혐오는 감정의 일종이다. 무언가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눈살을 찌푸릴 정도로 강하게 싫어하는 감정이다. 영어로 하면 disgust다. 말 그대로 구역질이 난다는 의미이다. 단순히 미워하거나 기피하는 수준이 아니라 역겨워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혐오는 증오와 가깝기도 하다.

차별은 행위이다. 상대를 구분해서 차등하게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혐오가 내적인 감정 상태라면, 차별은 행위의 물리적인 결과물이다. 차별은 외부로 표시된다.

감정은 개인의 영역이다. 어떤 감정을 갖든 그건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이상 (표현하더라도 이를테면 조롱이나 폭력에 이르지 않는 정도라면)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하지만 행위는 외부에 영향을 준다. 따라서 행위는 개인이 아니라 집단과 사회의 영역이다.

혐오는 사실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본능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혐오감을 느끼는 덕분에 불결한 것을 멀리하고 위험한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어떤 대상에 혐오감을 갖느냐는 개별적인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부분도 있지만, 어쨌든 혐오 자체는 정상적인 감정 상태인 것이다.

하지만 차별은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점에서는 미성년자의 출입을 제한한다. 미성년자에게는 억울한 대우일 수 있지만, 이것을 차별이라 하진 않는다. 합리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별은 합리적인 이유 없이 불공정하게 대우하는 것을 의미한다. 피부색을 기준으로 가게 출입을 제한하는 것처럼.

혐오와 차별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차별은 없애야 맞지만, 혐오는 없앨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혐오는 자연스러운 감정의 일종이고, 어떤 대상에 혐오감을 갖느냐는 순전히 개인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혐오는 그 자체로 문제가 될 수 없다. 수많은 이들이 그만큼 많은 혐오감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혐오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크게 두 가지 문제의 경향이 있다.

첫째로 혐오 자체를 없애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 거리로 나와 여성혐오를 멈춰달라고 집회를 하는 것이다. 혐오라는 건 그게 범죄로 표출될 때 문제가 될 뿐 혐오 자체가 문제가 될 수는 없다. 또 혐오는 법과 제도를 만든다고 없어지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혐오는 인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혐오범죄를 규탄한다고 집회를 하는 건 응징을 바라는 분노 표출에 불과한 짓이다.

둘째로 혐오 대상을 없애려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고기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개고기 문화를 없애려 하는 것이다. 이는 특정 대상에 갖고 있는 혐오감을 없애는 게 아니라 그 대상을 없애려 하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차별은 이런 메커니즘에 의해 만들어진다. 혐오감이라는 강렬한 감정이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켜 편견과 선입견을 재생산시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혐오를 없애자"라는 말은 잘못된 말이다. 각자 다른 삶의 기억, 문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혐오감을 갖고 지낼 수밖에 없다. 때문에 혐오를 없애는 건 애초에 가능한 명제가 아니다. 혐오는 근절되어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수용되어야 한다. 혐오를 직시하고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다.

차이를 인정하라는 말도 같은 맥락에서 나오는 거다. 이 말은 차이를 없애라는 게 아니다. 각자의 차이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차이를 받아들이라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나'와는 다르고 어색하고 불편한 걸 그대로 긍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대상을 (존중까지는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둘 수 있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다. 혐오감이 든다고 그것을 없애거나 못하게 하는 게 아니라 두 눈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리는 것, 쿨함은 이런 태도에서 나오는 거다.

권리는 이익을 누리는 게 아니라 침익을 막는 개념에 가깝다. 무언가를 권리로 내세우려면 그 무언가는 이미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권리란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갖고 있던 것을 되찾을 때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전부 우리의 권리에 속한다. 다만 평소에는 침해받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권리라고 어필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우리가 권리를 내세우는 경우는 대부분 마땅히 누려야 할 무언가를 누리지 못했을 때다. 예를 들어 합당한 이유 없이 상품 환불을 거부당하는 경우 소비자의 권리를 근거로 부당한 처우를 바로잡으려 하는 것처럼.

호의를 권리로 착각하지 않으려면 그것이 내가 평소 당연하게 갖고 있었던 권리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곰곰히 따져봐야 한다. 당연한 권리가 아님에도 내가 누리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누군가의 호의 덕분일 가능성이 크다. 이를 모르고 그것을 나의 당연한 권리로 주장한다면 스스로 진상이 되는 것이다.

퀴어축제가 도심 한복판에서 개최된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 같은 건 없다. 퀴어축제가 많은 이들의 혐오와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해도 그것이 그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하는 건 권리가 아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는 건 권리가 아니라 꼰대질에 가깝다.

보편적인 이론을 따라 인류사를 세 단계로 나눠본다면, 그러니까 농업·산업·정보혁명으로 구분한다면, 사회 변화의 크기도 시간순을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빼면 산업화 시대를 살던 인간과 정보화 시대를 사는 인간의 생활상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지만, 농업혁명 이전에 수렵채집을 하던 인간과 작물을 재배하던 인간의 차이는 그야말로 동물과 인간의 그것만큼이나 다르기 때문이다.

각 단계를 거치며 인간은 생산성을 얻었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았다. 유발 하라리는 농업혁명을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말한다. 식량생산의 총량은 늘어났을지 몰라도 농부 개인의 삶은 그 이전의 시대보다 열악해졌기 때문이다. 조직적으로 작물을 경작하면서 인류는 수렵채집인이 누렸던 자유롭고 초연한 삶을 잃게 된 것이다.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였다. 인류는 산업혁명으로 잃게 된 것을 인간성이라고 정의했다. 그만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상실했다는 이야기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도하는 것도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주가 되었다. 그만큼 인류에게 산업화란 변화는 감당하기 힘든 혼란과 고통이었다. 뒤르켐이 말한 '아노미'의 개념처럼 무규범의 상태, 그러니까 기존의 모든 질서와 개념이 ‘무’의 상태로 초기화되었다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의 리셋 버튼을 누른 것처럼.

결국 ‘세상이 미쳐돌아간다’는 말은 신조어가 아니란 말이다. 인공지능혁명, 나노혁명, 바이오혁명 등 현 시대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돌아다니는 것처럼 우리가 변화나 전환의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다만 중요한 건 우리가 변화를 겪는 첫 세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에게 세상은 늘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영철, 조두순, 고유정, 온갖 묻지마 범죄들, 최근에는 정인이 사건까지. 일련의 패륜 (혹은 불가해한) 범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이 미쳐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최근에 국한되어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연쇄살인, 패륜 같은 범죄들은 오랜 역사의 기록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류사 전체로 볼 때는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사건들과 차이가 있다면 단지 이슈화 되지 않았다는 점뿐이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생긴 건 비교적 최근이었으니까.

세상이 미쳐가고 있다거나 세상이 말세라는 사고방식은 종말론적 세계관에 불과하다. 세계가 점점 카오스적으로 타락해서 어느 순간 종국을 맞이한다는 건 사이비 종교의 단골 레퍼토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건 사실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던 이야기다. 이미 수백수천 년 전부터 사이비 교주가 중생을 향해 속삭이던 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세대적인 선민의식을 낳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는 말처럼, 과거의 세대는 옳았지만 현 세대의 과오 때문에 세상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세대적 선민의식에 매몰된 사람들이 사회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지는 뉴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흔히 ‘꼰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사람들은 서울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기도 하고 청와대에서 학생 시절의 혈기만 앞세워 반쪽자리 정책을 입안하기도 하니까.

세상은 늘 변해왔고, 앞으로도 변할 거다. 아마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사실 빼고는 모든 게 변할 수도 있다. 세상의 변화가 주는 충격의 정도는 사람마다 그리고 세대마다 다를 수 있지만, 그 충격을 본인 또는 본인 세대만이 겪는 혼란으로 오인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가 특별한 시대인 것도 아니고 우리가 특별한 세대인 것도 아니다. 요즘 들어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은 원래 미쳐 돌아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세상이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은 원래 이 모습이었는데 우리는 이제야 그 사실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의 끝’은 주인공 ‘나’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내면의 세계이다. 누구나 이런 세계를 품고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편화된 이미지로 얽혀있는 카오스적인 내면의 핵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처럼 단단한 코끼리공장을 갖고 있어야 하며 박사가 만들어준 제3의 회로를 통해서야 비로소 ‘세계의 끝’으로 갈 수 있다.

인간의 내면에 스스로가 설계한 세상의 존재를 상정하는 건 영화 ‘인셉션’과 비슷하다. 하지만 ‘인셉션’과 이 작품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있다. 같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은 다국적 기업 간의 주도권 다툼으로 이야기를 확장시킨 반면, 하루키는 개인의 의식세계로 이야기를 축소시킨다. 무한히 작은 한 점을 향해 축소되는 건 마치 ‘백과사전의 봉’을 떠올리게 한다.

그 한 점에 위치해 있는 세계의 끝은 결락의 공간이다. 실제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곳에는 결여되어 있다. 그곳에도 사람들은 살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자아도, 가치관도, 마음도 없다. 습관처럼 남은 순수한 생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하루키 소설들의 주인공은 모두 외로운 존재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나’ 역시 외로운 인물이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다. 하지만 ‘세계의 끝’은 더 고독한 세상이다. 그곳에는 사람과 사람을 잇는 마음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받아주는 건 단지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혹은 단순한 배려심 때문에 받아주는 것뿐이다.

하루키의 멜랑콜리함이 인물의 차원이 아니라 총체적인 차원에서 발현된 세상이다. 이곳에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음악도, 문학도, 위스키도 없다. 간간히 느끼는 알 수 없는 따스함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목적없는 운동만이 존재하는 세상이다. 마치 하루키라는 필터로 하루키 월드를 한번 더 거른 것 같다. 가장 하루키적인 알멩이만 남게 된 세상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남는 쪽을 선택한다. 그림자와 함께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홀로 세계의 끝에 남은 것이다. 그곳은 다름 아닌 ‘나’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구멍 뚫린 주머니처럼 계속 잃어가는 게 나 자신이라고 해도 계속 잃어가는 인생이 곧 나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숲속의 삶처럼 고단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끝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어쩔 수 없다. 설령 모든 것을 잃어 습관만이 남은 삶이라 하더라도 나는 내 삶에 책임을 다하는 것밖엔 없다.

코로나로 무관중이 된 덕분에(?) 축구 중계에서 선수와 코치들의 소리가 잘 들리게 됐다. 그간 관중의 소음에 가려졌던 소리가 중계진의 마이크에 고스란히 담기고 있는 것이다. 서로 부르는 소리, 작전을 지시하는 소리, 심판에게 어필하는 소리 등등. 생각보다 많은 목소리가 경기장을 메운다.

그중에서 상대 선수나 심판을 향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고함소리의 대부분은 자기 팀 동료들을 향한 소리다. 감독이나 코치만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건 아니다. 선수들 서로가 서로에게 지시를 한다. 누구를 맡아라, 어디로 달려라, 패스를 해라, 슛을 해라 등등.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의 목소리가 쉴 정도다.

때로는 신경질적인 고성이 오가기도 한다. 같은 팀 동료끼리 충돌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손흥민 경기만 봐도 팀 동료와 갈등하는 장면은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왜 본인에게 패스를 하지 않았냐고 불만을 갖는 것이다. 공격수들은 항상 공이 본인에게 오길 바라기 때문이다. 공격만 그런 건 아니다. 수비수들끼리도 (때로는 골키퍼까지) 상대를 어떻게 막을 것인지를 두고 격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팬들은 걱정스럽게 보기도 하지만 선수들은 쿨하게 반응한다. 그런 갈등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것이다. 경기 중 같은 팀 동료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선수가 있어도 그의 행위를 문제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감독들마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경기의 한 부분이라고 여길 뿐이다. 하지만 국내의 반응은 달랐는데, 같은 팀 동료끼리 충돌하는 건 국내 정서로서는 굉장히 낯선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집단주의적 성향이 강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목소리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명하복의 수직적 질서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직장에서 점심 메뉴를 정할 때조차 튀지 않으려고 눈치를 보는 세상에서 개인적 견해를 어필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후배라면 선배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위계질서 속에서 구성원끼리 큰 소리를 내고 다투는 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그림이다.

국회의원이 당론과 다른 의견을 냈다고 해서 당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도 이런 문화 때문이다. 권위주의를 몰아내는데 젊음을 바쳤지만 스스로도 권위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된 건 운동권 세대의 아이러니한 특성이다. 투쟁적인 태도에서 연유된 것인지 아니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산업화세대를 닮아버린 것인지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꼰대란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은 형식적 민주주의에만 집착할 뿐 실질적인 민주적 가치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이고 있다.

소수의 지도부가 당론을 정하고 다수의 의원들은 그것을 따르는 거수기가 되어버리는 게 지금 여의도의 모습이다. 최장집의 비판대로 과거 독재정권의 여당과 다를 게 없는 모습이다. 정당이라는 건 집권을 위해 일사분란한 조직력을 보여주는 이익집단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다양성을 수용하고 대변할 수 있어야 하는 정치결사체다. 권위주의나 성장주의가 아닌 민주적 가치를 우선으로 하는 정당에 있어야 할 건 지시나 명령이 아니라 토론과 대화인 것이다.

히딩크는 대표팀에서 위계질서를 없앴다. 경기할 때만큼은 존칭이나 존댓말을 쓸 수 없게 했다. 선배 선수들만 뭔가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후배 선수들도 선배들에게 자유롭게 지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이천수가 홍명보에게 "명보! 패스!"라고 소리쳤던 것처럼. 좋은 경기력을 위해서는 자유로운 소통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집단 내에서 자유롭게 여러 의견이 나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건 잡음이 아니라 더 나은 의사결정을 위한 과정에 가깝다.

정치든 축구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열과 오를 맞춰야 하는 매스게임과는 다르다.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결과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소수의 리더를 따라 획일적으로 움직이던 꼰대의 시절은 지났다. 축구에서도 잘하는 팀은 늘 시끄럽다. 소리치고 떠드는 선수들이 많기 때문이다. 군기가 없는 집단을 가리켜 옛날 말로 당나라 군대라고 했지만, 지금 필요한 건 그런 태도일지도 모른다. 당나라 군대 같은 느슨함과 자유로움, 그리고 눈치 보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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