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파상은 소설가의 재능은 창조하는 능력이 아니라 관찰하는 능력에 있다고 말했다. 소설은 관찰에서 시작된다. 경험만으로 허구의 세계를 창조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모르는 걸 쓸 수도 없는 일. 그래서 작가들은 취재를 한다.
비유하자면 50개의 단막극보다 50개의 단편영화를 보는 것 같다. 연령도 성별도 직업도 맥락도 제각각인 삶들을 밀도 있게 묘사했다. 자칫하면 산만해지기 쉬운 50개의 에피소드를 가볍지 않게 응집시켜주는 건 그 발품의 무게다.
결론에서는 이 소설이 취한 형식의 당위를 보여준다. 다소 직접적이긴 해도 상관없다. 타란티노가 맨슨 패밀리 사건을 재해석한 것처럼 그것이 메타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면 뻔해 보이는 의도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뉴스는 숫자를 말한다. 사망자 몇 명, 실종자 몇 명. 이 소설은 그 한 명 한 명마다 지닌 사연과 맥락들을 환기시켜준다. 우리에게 벌어진 일들이 어떤 걸 앗아갔는지, 그리고 소설이란 방식이 그 상실을 어떻게 위로하고 기억할 수 있는지.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오세아니아의 한 부족에는 최근까지도 식인 장례 풍습이 이어져 왔었다고. 죽은 이의 영혼을 남겨진 이들의 몸 안에 간직하겠다는 의미에서 시신을 나눠 먹었다고. 그런 그들에게 시신을 불태우거나 땅에 묻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거다. 그건 누군가의 영혼을 불태우거나 땅속에 버려두는 것이나 다름없었을 테니까.
이들과 우리의 차이점은 각자 다른 조상을 뒀다는 점뿐이다. 우리의 조상이 혹은 우리의 조상을 지배했던 부족이 시신을 화장하거나 매장하는 관습을 가진 부족이었기 때문에 그 외의 장례 관습을 낯설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죽은 연인을 먹는다는 건 그렇게 이상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안에 남겨두고 싶은 소망 때문에 그를 먹는다는 건 원초적이긴 해도 말이 되는 이야기니까. 함께 하거나 함께 있거나 소유하는 걸 넘어 내 안에 두고 하나의 존재로 만들겠다는 건 누군가를 사랑하는 극한의 방법일 수 있다. 애도의 방법이 그렇듯 사랑의 방법에도 정답은 없으니까.
이 작품은 사랑에 대한 소설이다. 가난의 되물림, 속물주의 같은 사회적 소재들은 이 극단의 사랑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수단일 뿐이다. 구와 담을 벼랑 끝으로 몰아서 서로의 존재만이 남도록 만든다. 그리고 모든 불순물들을 걷어내고 원형만이 남았을 때 그 극한의 사랑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소설이 많은 이들에게 읽힌 건 바로 그 이유에서다. 식인이라는 자극적인 설정이나 그로테스크함이 이 소설의 정점은 아니다. 소설에 등장했던 사회적 소재들만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복잡한 맥락 속에 얽혀있다. 때문에 모든 걸 버리고 사랑만을 갈구하는 건 낭만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원초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심연을 건드리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공원을 누빈다. 아빠가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고 싶은 곳으로 그냥 내달린다. 경험으로 아는 거다. 아빠가 자기를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어떤 속도로 가든 아빠가 따라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이에게 변수가 생길 땐 달려가면 된다. 위험한 곳으로 가려 하면 달려가서 방향을 틀어주고, 걷다가 넘어지면 달려가서 별일 아니라는 듯 흙을 툭툭 털어주고, 아빠를 찾는 듯 하면 뒤에 따라가 인기척을 내면서.
아이는 얼마간의 해방을 누리고 나는 그런 아이를 눈으로 좇고, 그렇게 산책하는 시간이 좋았다. 항상 이거 하지 말아라 저거 하지 말아라 옭아매던 아이에게 잠깐의 자유를 준 것 같아 흐뭇하기도 하고, 뭔가에 몰두하는 아이의 모습이나 불안정하게 걷는 아이의 걸음걸이는 늘 봐도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은 이내 애틋함으로 번져간다. 이 시간도 결국 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아이는 금방 자랄 것이고 언제까지나 아이를 내 시야에 둘 수만은 없으니까.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아빠 없이도 부딪히고 넘어져가며 세상으로 나가야 하니까.
누구나 겪는 과정이지만, 그리고 그 누구나라는 건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걸 인정하지만, 그 범주에 내 아이를 포함시키는 건 또 다른 차원의 일이다. 불안정하게 걷고 넘어질 듯 뛰는 아이를 홀로 세상에 내놓는 건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아이는 커간다.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더 자주 산책을 하는 것밖에 없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아이가 ‘고고 다이노’를 그만 좋아할 것 같다던 가을이 오면 부지런히 아이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고 싶다.
이 책의 제목은 다른 누구라기보다 자신에게 묻는 안부라는 생각이 든다. 과거의 나에게 묻는 스스로의 안부. 크기는 다를 수 있지만 상처 없이 자란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 상처 때문에 뒤틀린 행동을 하기도 한다. 약점을 가리기 위해, 뭔가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때로는 스스로에게 벌을 주기 위해.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삶을 보면서, 그러니까 그가 삶을 어떻게 살아내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살아내는지를 보면서 누군가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결국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는 걸 깨닫게 되는 거다.
삶에는 무수한 실패와 좌절이 뒤따른다. 숙명과도 같다. 직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해미의 편지들처럼 상자에 봉인해서 구석에 쳐박아둘 수 있는 무엇도 아니다.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냥 감당하며 살아내는 것뿐이다. 나름의 노력과 나름의 방식으로.
파독간호사들에게도 흔히 상상하는 희생적인 삶만 있었던 건 아니다.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각자 추구하는 것을 따라 나름의 삶을 찾으려 했다. 서로에 대한 다정함을 잃지 않고 그들만의 삶을 가꾸어나갔던 것이다.
어차피 삶은 변수들투성이다. 앞으로도 많은 실패와 좌절이 닥쳐올 것이고, 그로 인해 상처도 입고 방황도 하게 될 것이고, 얼마간은 후회와 자기심판에 갇혀있기도 할 것이다. 다만, 시간이 지난 뒤에는 갇혀 있던 스스로에게 안부를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옆에는 다정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어빙 고프만은 삶을 무대와 백스테이지로 구분한다. 무대가 남들에게 보여지는 사회적 공간이라면, 백스테이지는 무대에서의 시간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개인적 공간이다.
SNS에 포착되는 건 주로 무대 위에서의 모습들이다. 이왕 보여지는 거 일상에서 먹는 라면 사진보다 유명한 식당에서 먹는 요리 사진을 올리는 건 자연스런 습성이니까. 가슴을 부풀려 몸을 크게 보이게끔 애쓰는 비둘기처럼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는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삶의 대부분은 백스테이지에서 보내는 시간들로 이루어진다. 회사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서 공부를 하거나 집을 정리하거나 널부러져 쉬고 있는 때처럼 삶을 유지하기 위한 시간들이다. 매 끼 외식을 할 순 없고 매일 여행을 갈 순 없다. SNS에 게시되는 건 여행지에서의 한 컷뿐이지만 그 순간을 위해서는 긴 시간 반복되는 일상들을 견뎌야 한다.
이런 시간들은 SNS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은 착각하기 쉽다. SNS에 노출된 순간들을 누군가의 전체 삶으로 오인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이면에 감춰진 백스테이지를 인식할 만한 능력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건 과정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꾸준히 노력해서 성취하고, 때로는 좌절하지만 그것을 견디는 과정들이 아이의 자아를 만들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무대가 아니라 백스테이지이다. 전시의 공간이 아니라 성장의 공간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무대만을 보도록, 무대에서 전시되도록 놔두어선 안 된다
과거에는 아이들도 어른 옆에서 흡연을 했다. 흡연이 유해하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원래 새로운 게 나타나면 그것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부작용을 파악하고 그것을 최소화시켜서 자리 잡게 만드는 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이들에 대한 SNS 사용을 처음 제한하기 시작한 곳이 공교롭게도 그 SNS를 탄생시킨 캘리포니아 지역이란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SNS에 대한 규제가 후지거나 시대착오적인 발상이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자녀의 인터넷 사용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세대는 인터넷을 접하며 자라온 세대다. 신기술에 대한 무지로 선입견부터 갖던 이전 세대와는 다른 세대인 것이다. 이들은 SNS의 이면성이나 알고리즘이 얼마나 무서운 시스템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SNS 기업들이 자신들로부터 빼앗아간 것들을 자녀들로부터는 보호하고 싶은 것이다.
“표리가 부동하네.” 핵심은 여기에 있다. 누구든 겉과 속이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누군가의 겉모습일뿐 그 속에 있는 마음은 볼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를 안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무감하고 냉소적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치열하고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던 경애처럼. 그리고 융통성 없고 사회성이 부족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어떤 누구보다 진심으로 타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상수처럼.
이 소설은 마음을 다루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과업인지를 이야기한다. 표리부동의 세계에서 겉과 속의 간극,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보통 그 거리를 메우려는 시도에서 출발하지만 이 소설에선 그러지 않는다. 오히려 그 거리를 인정하는 데서 모든 게 시작된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냥 놔둔다.
대화가 필요하다는 말을 쉽게 하곤 한다. 대화를 하면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건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니다. 마음은 계산되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대화만으로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도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적일 수 있다는 뜻이다.
돌이켜보면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 누군가에게 위로랍시고 섣부른 조언을 해준 적이 많다. 하지만 그건 위로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위로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 함부로 이해하고 해결해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다 위로하고 싶은 이의 곁에 있어 주는 것이다. 상처받은 마음과 함께 그저 내 옆에 두는 것. 끝내 내가 이해하지 못한 마음이 있더라도.
자극적이지 않으면 주목 받지 못하는 시대, 표리부동이라고 한다면 ‘표’의 시대에서 겉이 아니라 그 안의 마음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뜨겁거나 차가운 자극들 가운데서도 마음을 다룬 이야기만은 정온동물의 몸속처럼 일정한 온도를 오간다. 그래서 이 소설은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마치 체온을 가진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