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급론. 나에게는 너무 낯익은 주제라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기생충도 설국열차와 마찬가지로 일차원적인 메타포에 가까웠던 것 같다. 기생충에 나오는 아랫동네 반지하 빌라부터 윗동네 대저택까지의 수직적 계층질서는 설국열차에서 봤던 맨 뒤 꼬리칸부터 맨 앞 엔진칸까지의 직선적 도식을 위아래로 세워둔 것과 다를 게 없다. 위쪽에 있는 상류층과 아래쪽에 있는 하층민. 사실 동어반복에 가까운 표현을 메타포라고 하기에는 좀 직접적인 비유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봉테일. 큰 줄기에서의 메타포는 (내 기준에서) 약했지만, 디테일은 역시 볼만 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가족들이 바퀴벌레 농담을 하다가 얼마 뒤에 바퀴벌레와 똑같이 테이블 및 그늘에 숨어들어가던 것처럼, 여러 가지 복선들, 그것과 이어지는 비유적 표현들, 보는 이에 따라서 얼마든지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여러 장치들, 그리고 이 모든 걸 엮어내는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력과 정교한 미장센까지. 더할 나위 없는 완성도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황금종려상. 유럽에서 호평을 받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한다. 하나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품의 완성도고, 다른 하나는 인간 이면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주제의식.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란 인간이 꾸며내는 가식과 대비될수록 좋다. (과외 장면에서 pretend란 단어가 등장했던 것도 같은 맥락인 것처럼) 그만큼 유럽인들이 갖고 있는 깊은 내면의 죄의식, 자괴감 같은 걸 건들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이성, 문명, 성숙함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지만, 사실 그들은 본인의 뿌리가 야만족으로부터 기원됐다는 역사적인 열등감 그리고 제국주의, 세계대전, 글로벌 무역구조의 가해자라는 자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가식의 가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작품일수록 자조적인 때로는 자기반성적인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홍상수의 작품에 열광하는 것처럼) 그런 맥락에서 기생충은 유럽에서 호평을 받기 위한 조건들을 정확히 충족시켰다고 볼 수 있다.

엔딩. 여기에 대해선 여러 반응이 있지만, 나는 답답하게 끝나는 게 좋았다. 클라이막스가 의외로(?) 뜨거웠던 만큼 다시 차가운 엔딩으로 돌아와서 좋았던 것 같다. 갑자기 해피엔딩 비슷하게 끝이 났다거나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메시지 같은 게 있었다면 지금의 뒷맛은 없었을 것이다. 블랙코미디란 장르에 충실했던 것 같다. 한바탕 코믹한 풍자가 벌어져도 마지막엔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그게 블랙코미디이기 때문이다. 반지하에서 시작해서 저 위의 대저택까지 올라갔지만 다시 반지하의 자리로 되돌아오는 것. 그 현실의 무게감이 그대로 답답하게 남을 수 있도록.

'살인의 추억', '괴물'을 본 후 봉준호 감독을 좋아하게 됐다. 하지만 '설국열차'를 보고 개인적으로는 실망을 많이 했다. 표현하자면 은유보다는 직유에 가까운 영화였기 때문이었다. 메타포와 나레이티브 모두 너무 쉬운 것 같았다. 너무 쉬운 건 좋은 게 아니다. 쉽다는 건 결론적으로 뻔하다는 이야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내에서 거의 천만에 가까운 관객을 모을 수 있었던 건 온전히 봉준호라는 이름값 덕분이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봉준호는 박찬욱과는 달리 오롯이 한국적 정서가 담긴 작품을 만들 때 더 진가를 발휘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설국열차'나 '옥자'보다는 '살인의 추억'이나 '괴물'의 봉준호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박찬욱이나 김기덕 같은 이들은 복수, 인륜 같은 보편적 인간성을 주제로 다룰 때 큰 임펙트를 주지만, 봉준호의 능력은 한국의 사회상, 시대상을 디테일하면서도 맛깔나게 풀어가는 데 있다. 때문에 굳이 '설국열차'나 '옥자'처럼 다국화(?)를 시도하면서 본인의 재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그리고 사실 인류 보편적 주제를 다뤄야만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다. 최근의 '로마'나 '그린북' 같은 영화들도 어떤 인류의 보편성을 담은 거창한 작품이 아니다. 일정시기의 멕시코와 미국만의 정서를 각각 담아낸 작품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배경과 분위기를 꼭 경험적으로 알아야만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60년대의 멕시코나 미국을 전혀 겪어보지 못했다고 해서 영화가 주는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 것처럼. 어떤 배경의 어떤 이야기건 훌륭한 작품은 어느 누구에게나 감동을 줄 수 있다. 영화이건 문학이건 그게 바로 드라마(drama, 극)의 힘이기 때문이다.

다국적인 스탭들과 만국공통의 소재(예를 들면 SF 같은)를 다뤄야만 국제적인 호평을 얻는 건 아니다. 오롯이 나의 이야기, 우리의 이야기에 집중해도 작품성만 확실하면 해외의 반응은 절로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생충'은 기대가 되는 작품이다. 영화의 내용은 아직 확실하게 모르지만 봉준호가 우리의 이야기로 다시 컴백한 느낌이랄까. 마침 칸에서 작품상도 받았고, (송강호는 원래가 봉의 페르소나이지만) 좋아하는 배우인 이선균과 봉준호의 조합도 기대가 된다. 빨리 보고 싶다.

이 작품에서는 도시(토론토)의 원거리 뷰가 자주 나온다. 계획도시답게 규칙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건물들, 네모반듯하게 촘촘히 박힌 아파트의 유리창들. 질서정연한 모습의 도시는 마치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과 같다. 그렇게 거미는 도시를 통제한다. 거미는 이성의 질서를 의미하는 거다.

그런데 욕망이란 건 일정한 통제 속에서 생겨나는 법이다. 어떤 대상이 언제나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해 굳이 욕망을 가질 이유가 없다. 하지만 대상이 (질서와 이성에 의해) 금기시 되는 무엇이라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 비로소 욕망이란 게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작품에서의 두 주인공도 (다른 이의 여자와 관계를 맺는 건 불륜이라는 금기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여자에 대해 탐욕을 느낀다. 그리고 첫 장면에 나오는 고급(?) 스트립바도 마찬가지인데, 매우 절제된 상황 속에서 행해지는 스트립쇼는 지켜보게 하는 것만으로도 남성들의 성적 쾌감을 최고조로 만든다(‘아가씨’의 낭독회처럼).

따라서 욕망과 질서의 관계는 엘리베이터의 거울과 같다. 양측 벽면에 거울이 달린 엘리베이터를 타서 한쪽 거울을 보면 다른 쪽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이고 다시 그 거울에 비친 내 쪽의 거울이 보이는 식으로 두 면의 상이 무한히 반복되어 쪼개진다. 욕망과 질서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작품에서도 아담(질서)이 앤소니(욕망)를 몰아내고 이성적 자아를 회복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그 자아 속에서 또 다른 새로운 욕망이 꿈틀거리게 된다. 그래서 마지막에 등장한 거미는 아담을 보며 겁을 먹은 듯 잔뜩 움츠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순간 엘리베이터의 거울처럼 욕망과 질서의 정반합이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재림 감독은 아이러니 전문가다. 예를 들어 굉장히 진지한 장면을 보여주면서 굉장히 경쾌한 배경음악을 삽입한다. '우아한 세계'에서 용역 건달들과 노가다패들이 포크레인과 쇠파이프로 피튀기는 패싸움을 벌일 때 경박한 음악을 깔면서 코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처럼('더킹'의 첫 장면인 교통사고씬도 배우들의 과장된 표정과 신나는 록음악으로 시작되는 것처럼). 그럼 내용과 분위기가 어긋나면서 생긴 부조화가 무거움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따라서 한재림 감독은 블랙코미디란 장르에 가장 특화된 감독이기도 하다. 블랙코미디란 말 자체가 블랙과 코미디라는 상반된 두 용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아이러닉한 의미이기 때문이다.

블랙코미디에서 가장 어려운 건 블랙과 코미디의 비율을 어떻게 나눌 것이냐에 대한 문제다. 너무 블랙으로 가면 풍자와 재미를 잃을 것이고 또 너무 코미디로 가면 장르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다. 따라서 둘 사이의 이상적인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한 일인데, '더킹'은 그런 균형이 좋았다. (조정래의 '풀꽃도 꽃이다'에서 느꼈던 아쉬움과는 반대로) 소재부터가 굉장히 시국적인 이슈였기 때문에 최대한 힘을 빼려 했던 게 주효했던 것 같다. 특히 엔딩씬을 배성우의 "아빠가 미안하다"로 마무리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완벽하려면 모호해야 한다. 철학이나 종교의 언어가 모호한 건 모든 것을 아우르려 하기 때문이다. 모호함 속에서 다양한 의미가 도출되기도 하고 그 담론의 영역이 넓어지기도 한다. 반대로 담론의 텍스트가 수용자들에게는 너무 어렵고 복잡하기 까닭에 모호함이 발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어떤 방향에서건, 완벽하려면 모호할 수밖에 없다. 영화로 따지자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그런 경우다. 그가 만든 ‘인셉션’이나 ‘인터스텔라’는 모호한 부분이 많다. 덕분에 다양한 해석과 유추가 회자된다. 하지만 기본적인 주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놀란의 주관적인 세계관이 투영되어있기 때문이다. 그 방대한 세계관을 영화라는 한정된 서사에 응집시키려다보니 불가피하게 모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제를 내레이션처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건 영화라는 예술적 장르에도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두세 시간의 런닝타임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반면 '곡성'은 다르다. '곡성'에서 모호함은 영화의 전부다. 관객을 속고 속이는 그 모호함을 걷어내면 사실 남는 게 별로 없는 영화다. 물론 나홍진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플롯, 그리고 오컬트란 장르를 훌륭하게 로컬화시켰다는 점은 평가받을 만하다. 다만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류의 영화는 아니란 얘기다. 깊이 있는 세계관이 담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종교적 혹은 철학적 메타포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를 본 후 멍해지는 순간은 있다. 하지만 그 여운은 작품 내의 적과 아, 선과 악을 구분하는 데서 오는 혼란스러움일 뿐, 깊은 공상에 빠지도록 만드는 여운과는 거리가 멀다. 작품을 곱씹을수록 깊이를 느끼는 게 아니라 찝찝함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일 거다.

그리고 찝찝함 느끼는 데에는 감독의 트릭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반전이란 건 생략을 통해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한 편의 서사 구조가 있다면 그 서사의 부분 부분을 생략함으로써 관객이 특정한 관점을 갖게끔 유도하는 거다. 이따금 비워야 하는 부분을 의도적으로 덜 생략함으로써 관객에게 힌트를 주는 복선을 만들기도 하고(예를 들면 일광의 훈도시처럼), 마지막에는 생략됐던 부분을 한 순간 드러내면서 물음표를 느낌표로 완성시키는 반전을 만들기도 한다. 완성도가 높은 영화일수록 이런 과정이 깔끔하게 흘러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곡성'은 관객을 속이는 데 몰두했던 만큼 잃는 것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게 외지인이 종구 일행에 쫓기는 장면이다. 결말을 고려해볼 때 이 장면에서 묘사되는 외지인의 모습은 개연성을 갖췄다고 하기 어렵다. 결말에서 드러난 외지인의 정체와는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후반부 반전을 위해 시점마다 캐릭터의 특성을 바꾸는 건 삼류에나 어울리는 기법이다.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나홍진답지도 못했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좋은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깊이 있는 영화는 아니라는 것. 적어도 내 취향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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