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긴 과업(?)을 시작한 건 처음이다. 회사에서 하는 일도 길어야 몇 개월이면 한 사이클이 끝나고, 수험생활도 몇 년 정도 걸렸을 뿐이고, 그나마 길다고 할 수 있는 대입 입시도 최대로 잡아 초중고 도합 12년 정도 걸렸다. 물론 12년이란 기간은 짧다고 할 수 없지만, 갓난아기를 인간으로 만드는 과정에 비하면 그렇게 긴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기대수명이 대략 80세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내가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에 따라 한 세기에 달하는 아이의 일생이 영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책에서나 봤던 시간 단위, 심지어는 내가 죽은 뒤에도 긴 시간 지속될 뭔가를 나는 막 시작한 셈이다. 물론 사람은 성장할수록 부모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그랬듯 내 아이도 언젠가는 성인이 되고 언젠가는 독립을 하고 언젠가는 결혼을 해서 새로운 가정을 꾸려갈 것이다. 하지만 인생 초반의 경험과 기억들이 그의 가치관, 성격, 취향 등 나머지 인생에 있을 거의 모든 것을 결정짓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내가 무슨 일을 시작한 건지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다. 마치 재난영화의 한 장면에서 땅이 꺼지고 해일이 몰려오는데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멘붕이 와서 멈춰 있는 사람처럼, 앞으로 닥쳐올 일들이 얼마나 큰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 같다. 어떻게 해야 이 아이를 부족함이 없이 제대로 키울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가도, 좀만 더 생각을 해보면 나부터가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인데 이런 내가 부족함 없이 아이를 키운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싶은 회의가 몰려오기도 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십수 년 교육을 받았지만 그 비슷한 것도 배운 적이 없다. 내가 어렸을 적 부모님을 보고 배웠던 것들이나 책, 인터넷 등 누군가의 간접경험을 통해 좋은 아빠라는 막연한 이미지들을 그려볼 뿐이다. 때로는 선택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아이를 엄격하게 키우느냐 혹은 자유분방하게 키우느냐 하는 고민처럼, 정답 없는 답을 계속 탐색해 나가야 하는 거다.
애가 애를 키운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이가 생기기 전까진 어른이 아이를 키우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직 나조차도 혼란스러운 게 많고 모르는 게 많은데 그런 내 앞에 문득 제 배고픔 하나 표현하지 못하는 아이가 나타난 것이다. 이제는 편의점에서 술을 사도 누구 하나 미성년자로 의심을 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내가 어른이 됐다고 자각한 적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니 난 아빠가 되어버린 거다.
어떤 부모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스스로를 완벽하게 준비된 부모라고 여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른이라고 해서 늘 확신에 차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닌 척하지만 스스로의 불완전함, 혼란, 불안 같은 문제 해결을 아이 때문에 일단 유예하는 것뿐이다. 아이 앞에서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삶의 다음 스텝을 밟는 거의 모든 일이 그런 것 같다. 대학생활도 회사생활도 결혼생활도 처음엔 실감나지 않은 상태로 시작했던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것도 그렇게 시작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분명 다른 차원의 일이긴 하다. 그만큼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지 얼마나 힘든 구간을 얼마나 자주 지나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물론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각자의 고충과 고민이 있겠지만, 그만큼 쉽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내는 일이기도 하다. 준비가 되었는지 의심하기보다 아이와 함께 큰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 다음 스텝을 밟는 모든 일이 그렇듯 일단 해봐야 한다. 당장 확신이 없다면 어른인 척이라도 해서. 그러다 보면 아빠로서의 역할이 그나마 편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직도 이 사회는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단일민족이라는 신화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고, 인종차별에도 둔감하다. 조지 플로이드 같은 사건을 보며 고개를 저으면서도 동남아인이나 중국인에게는 원색적인 차별을 서슴지 않는다.
원인은 여러 가지다. 문호 개방에 소극적이었던 시간이 길었던 반면 권위주의적 지배 체제는 오랜 시간 유지되기도 했고, 무엇보다 분단의 경험도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튀는 언행을 보이면 빨갱이나 반동분자로 몰렸다. 같음과 다름은 이곳에서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물론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분명 변했다. 이제는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면 꼰대 소리를 듣는 시대다. 하지만 같음에 대한 집착만은 여전하다. 권위주의나 집단주의는 옅어졌지만 한병철의 지적대로 SNS 등에 의한 과잉소통, 과잉정보가 자발적으로 같음을 추구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요즘 사람들이 그리는 행복이나 성공의 이미지는 전부 비슷하다. 오마카세 음식 사진이나 호텔방 셀카가 행복을 표상하는 이미지가 되었고,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취업해서 좋은 아파트에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의 기준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와 최대한 비슷해지기 위해 소비를 하고 공부하고 취업에 매진한다. 이렇게 비슷비슷한 소비 취향 또는 삶의 경로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은 비주류로 소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구 하나 강요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를 혹사시킨다.
겉으로 봤을 땐 개인주의가 강화된 것 같지만 되레 삶의 기준은 획일화되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만 쪼개졌을 뿐 각각의 알멩이들은 사실 따분할 정도로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적인 믿음과는 다르게 개인주의가 다양성이나 개성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과거 사회와 비교해 봤을 때 기존의 억압이나 규율에서 벗어난 건 맞지만 그럼으로써 우리가 진정 자유로워졌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는 쉽게 답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다름을 그 자체로 수용하지 못하고 우열이나 선악의 잣대로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획일성의 지옥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경직된 세상에서 다름은 곧 고통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처럼.
'헬조선'이란 말이 이 사회를 자각하는 일반적인 비유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만큼 세상에 대한 조소와 냉소가 가득하다. 부조리를 맞딱드리기보다 피하는 것이다. 진지하게 대하는 대신 비웃고 마는 것이다. 플레이어가 아니라 관전자처럼.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 상황이 달라진다. 비웃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동안은 비웃음으로써 피해버리면 그만이었지만, 내 아이는 그럴 수 없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내 아이도 홀로 부조리의 소굴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비웃음보다는 식은땀이 나올 수밖에 없다. 내 아이마저 플레이어가 되어야 하는 마당에 언제까지 관전자로서 지켜만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야구장에서는 이종범이 이정후가 야구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이곳은 야구장이 아니다. 이곳은 현실이다. 지옥으로 비유되는 부조리의 세상인 것이다.
더 이상 비웃을 수 없다면 맞딱드려야 한다. 부조리를 없애야 한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내 아이를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할 수 있는 건 길어야 십수 년뿐이다. 그 사이 세상을 바꾼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부조리를 없애는 건 오랜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부모는 세월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대기오염을 줄이기 위해 나무를 심는 일 따위는 이들에게 전혀 의미 없는 일이다.
따라서 부모는 아이를 위해 부조리를 없애기보다 부조리에 편승하는 쪽을 주로 택한다. 플레이어가 될 아이에게 반칙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주기보다 반칙을 가르쳐주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너도 나도 다른 부모들 역시 반칙을 전수하고 있는 와중에 내 아이만 정직하게 세상에 밀어넣을 수는 없다.
헬조선은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부조리를 비웃는 관전자, 부조리를 답습하는 부모, 부조리를 배워가는 아이. 그렇게 관전자는 부모가 되고 부모는 아이를 낳고 그 아이는 다시 관전자가 되는 것이다. 탈조선을 입에 달고 살지만 사실 이 사회를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진정한 의미에서 헬조선을 탈출하는 길은 이 부조리의 굴레를 멈추는 방법밖엔 없는 것이다.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은 전혀 다른 문제다. 법에서는 위반인지 아닌지를 따진다. 법적 판단의 기준은 bad or not이다. 반면 정치에서는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인지를 따진다. 정치적 판단의 기준은 good or not이다.
정치는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일이다. 정치인은 여러 선택지 중 무엇이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인지 판단해야 한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데 있어 bad or not은 의미 없는 기준이다.
bad or not에서는 현상유지가 최선이다. 진보의 여지가 없다. 기존의 룰을 잘 지켰는지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not bad가 아니라 good을 제시하고 화두를 던지는 사람이다. 정치인에게 현상유지는 목표가 될 수 없다.
정치인의 책임은 bad or not이 아니라 good or not의 영역에 있다. 정치인은 법을 위반했는지가 아니라 어떤 가치 판단을 했는지에 따라 평가받아야 한다. 법적 판단과 정치적 판단이 다른 것처럼 법적책임과 정치적 책임도 다르다.
그럼에도 법적 책임과 정치적 책임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법조인들이 요직에 있어서 그런지 정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이 과잉된 상태다. 하지만 정치인이 정치적 책임보다 법적 책임을 이야기하는 건 책임 회피에 가깝다. 정치인의 입에서 사법부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말이 나온다는 건 스스로 정치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음을 자인하는 것이다.
아이가 부쩍 재롱을 떤다. 손뼉을 치거나 주먹을 오므렸다 펴면서 어른들의 눈치를 살핀다. 아무 분간도 못하던 아기가 이제는 타인의 반응을 기대하는 것 같다. 어른들이 호들갑을 떨면서 칭찬을 해주면 아기는 더 신이 나서 계속 칭찬 받을 짓을 멈추지 않는다.
어른이 되는 건 이런 타인의 반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과정인 것 같다. 아이를 움직이게 하는 건 보호자의 반응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아이 때처럼 나를 계속 지켜보며 칭찬하거나 혼내주는 사람이 없다. 혼자 판단하고 혼자 만족해야 한다. 매슬로우의 최종단계, 자아실현처럼.
진짜 어른은 누가 보든 말든 한결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보는 이가 없어도 자신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자기 의무를 다한다. 보행자도 차도 아무도 없는 교차로에서 홀로 신호를 지키는 사람처럼.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이 멋있었던 건 혼자 있을 때조차 한결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드라마에선 도청 같은 극단적인 장치를 설정한다. 노출되고 있는지도 모르게 노출될 때가 제일 멋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오로지 기념하기 위해 SNS에 사진을 올리는 사람은 없다. 기념하는 게 목적이라면 사진으로 남기면 될 뿐이다. 굳이 SNS에 올릴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오마카세 식당에서 찍은 음식 사진을 SNS에 올리는 건 그순간을 기념하는 것보다 ‘나’는 원래 이런 곳을 찾는 사람임을 드러내고 싶은 심리가 기저에 깔려있다. 미식 자체를 즐기는 게 아니라 타인의 부러움이나 보여지는 자기의 이미지에 만족을 얻는 것이다.
결국 고급식당에 가거나 명품을 사서 SNS에 올리는 것과 아이가 보호자의 반응을 살피며 재롱을 부리는 건 같은 이유 때문이다.
다만, 아이가 재롱을 부릴 땐 반응을 학습하며 인지능력을 키우게 되는 반면 SNS를 하며 남는 건 박탈감과 ‘좋아요’의 숫자뿐이라는 사실, 그리고 아이는 보호자와의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반면 SNS에서는 방문자라는 실체없는 관계에 집착하게 된다는 데 차이가 있다.
SNS를 하게 만드는 인간의 본능들, 이를테면 관계의지, 연결감 같은 것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다. 그건 타인이나 외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구속되기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결국 SNS는 어른이 되는 걸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이 꽤 드나들었던 이 블로그도 지금은 조용하다. 포털에도 노출되고 댓글마다 논쟁이 붙었던 예전도 물론 재밌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처럼 보는 이 없는 블로그에 자조적으로 남기는 글들이야말로 진정한 나와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요한 블로그를 채워나가는 것도 어른이 되는 하나의 연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