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는 여론의 흐름을 따를 수밖에 없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대의제에서, 사법부는 법리와 판례에서 각각의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에게는 그런 정당성이 부족하다. 법관이 선출직으로 구성된 것도 아니고 세밀하게 위임된 법원이나 축적된 판례도 없다. 헌법이라는, 그것도 관습법을 포함하는 아주 광범위하고 애매한 기준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헌법재판소가 국민정서를 거스르는 결정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UN의 사무총장은 사실 얼굴마담에 불과한 자리나 다름없다. 선출 방식이 비공식적이고 관행적이라는 점 그리고 주로 중소국가에서 선출된다는 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반대로 사무총장이란 자리가 굉장히 중요하고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면 치열하고 객관적인 선출 과정이 있었을 것이고 강대국 출신들이 그 자리를 두고 경쟁했을 것이다(예를 들면 FIFA의 회장처럼). 어차피 중요한 의사결정은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의 몫이고, 사무총장은 얼굴마담으로서 갖가지 행사나 현안을 챙기며 UN이란 기구의 대표성만 갖는 직책이다.

반기문이 생각했던 국가의 대통령이란 직책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대통령직을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마담 정도로 인식한 셈이다. 이곳에 가서 웃으면서 손 흔들어주고 또 저곳에 가서 미소를 지어주며 덕담 같은 입에 바른 말만 하는 그런 얼굴마담. 실제로 그가 보여준 행보도 이런 모습뿐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단순히 얼굴마담으로 치부될 수 없는 직책이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최고 결정권자다. 국가적인 비전과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하며 첨예한 대립이 맞서는 가치 판단에 있어서도 본인만의 생각과 신념이 있고 그 책임에도 주저하지 않아야 하는 자리다.

사실 낯선 광경은 아니다. 박근혜가 몰락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녀 또한 대통령의 역할을 얼굴마담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본인의 얼굴에 많은 공을 들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본인의 역할을 공화제의 대통령보다는 입헌군주제의 여왕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외모 치장에만 신경을 썼을 뿐 사람들이 바라는 대통령의 역할, 아주 기본적인 역할마저 소홀히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분노했던 것이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건 현실 문제에 대한 깊은 고민 속에서 나름의 결론을 제시할 수 있는 지도자다. 애초에 반기문은 이와 거리가 멀었다. 십 년이란 긴 시간 동안 이곳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바로 지금 우리 삶을 위협하는 각종 현안에 대해 무감각할 수밖에 없었다. 더 심각한 건 그것을 본인의 약점으로 생각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그가 보여준 행보는 각종 현안들에 대한 연구와 고민보다는 꽃동네나 묘소 참배 같은 보여주기식 코스프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 그 둘을 가르는 기준을 두고는 많은 논쟁이 있지만 간단하게 말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성장이냐 분배냐. 둘 중 어디에 더 큰 가치를 둘 것인가. 흔히 말하는 것처럼 파이를 키우는데 집중하면 보수라 하고 파이를 나누는데 집중하면 진보라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파이를 키우는 동시에 나누는 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트루먼이 외팔이 경제학자를 찾았던 것처럼 두 가치를 함께 잡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가를 잡으면 실업률이 상승하고 실업률을 잡으면 물가가 상승하는 게 필연적인 법칙이다. 어느 한 쪽이 올라가면 반드시 어느 한 쪽은 내려갈 수밖에 없다. 마치 시소와 같다(물론 시소처럼 이도저도 아닌 가운데 지점을 찾을 수도 있지만).

그런 점에서 '따뜻한 보수'라는 건 모순적인 구호다. 물가와 실업률을 모두 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보수적 가치는 실업률을 잡는 대신 물가를 포기하는 선택을 말한다. 성장을 위해 양극화를 감수하는 거다. 결국 시소의 양쪽이 모두 내려가 있거나 모두 올라가 있을 수는 없는 것처럼 '따뜻한 보수'라는 캐치 프라이즈는 성립조차 될 수 없는 말이다.

정유라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건 기회의 불평등때문이다. 입시 시스템을 뛰어넘는 사유화된 권력의 힘으로 명문대에 부정입학을 했다는 점이 공분을 사고 있지만 사실 그 입시 시스템 자체에 대해서도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승마 하나만으로도 대학(명문대를 포함한) 입시가 가능한 현재의 시스템말이다. 승마는 엘리트 중에서도 엘리트스포츠다. 비용부담마저도 크기 때문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구경조차 힘든 스포츠다. 대중화된 종목도 아닌 건 당연할 뿐더러 그렇다고 어떤 전통체육으로서 맥을 이어야 하는 종목에 속해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이곳에서는 굳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며 육성해야 할 가치가 있는 스포츠 종목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나 기업, 유류의 대학들까지 승마를 붙들고 있는 이유는 딱 한 가지다.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기 위한 엘리트체육인을 육성하기 위해서다. 때문에 장시호든 정유라든 승마 하나만으로 유명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바로 지금의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었던 거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번째는 극소수만을 위한 엘리트스포츠 종목이 사회적 비용으로 유지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이런 종목들이 유지되면서 수혜를 입는 사람은 이 종목의 학생과 교수뿐이다. 사실 그마저도 학생이 교수가 되고 다시 새로운 학생들이 들어오는 단촐한 과정이 반복될 뿐이다. 이런 극소수를 위해 사회적으로 막대한 비용을 감수해야하는가는 한번 고민해 볼 문제다. 두번째는 승마 같은 고비용 엘리트스포츠는 높은 진입장벽때문에 자체만으로도 기회의 불평등을 야기한다는 점이다. 억 단위가 넘어가는 말을 산다는 건 사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와닿지 않는 현실이다. 그만큼 승마 같은 고비용 스포츠는 과거의 기부입학처럼 돈으로 대학을 갈 수 있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거다.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소설이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성과 메시지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필요하다. 문학적인 가치만으로도 손색이 없고 동시에 세상에 대한 작가의 시각이나 문제제기 또한 명확히 드러나야 하는 거다. 따라서 좋은 작품이란 두 극 사이에서의 적절한 지점, 그러니까 너무 직접적이지도 않고 너무 비유적이지도 않은 그런 위치에 놓여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균형을 잃은 작품이다. 문학보다는 르포에 가깝기 때문이다. 소설로서의 비유나 풍자는 없고 세태 고발만 있을 뿐이다.

그러다보니 지독히 현실적인 문제를 주제로 삼고 있으면서도 작품 자체는 사실적이지 못하다. 문학적인 디테일에는 아쉬운 면이 많기 때문이다. 일례로 작품 속 어린 학생들은 어휘 몇 가지만 최근의 은어들로 대치되었을 뿐(작가와 인물의 세대차는 고스란히 은어에 대한 작가의 집착으로 전가됐다) 여전히 '태백산맥' 때의 인물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말투를 쓰고 있다. 남발된 은어와 예스런 말투의 조합은 좀 끔찍했다.

전반적으로 소설 치고는 완성도가 아쉽다. 문제의식이 옳다고 해서 작품마저 고평가되는 건 어느 장르건 내 취향이 아니다. 메시지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소설의 형식을 빌렸다면 기본적인 작품성을 갖출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고 너무 직접적이기만 한 건 유치하게 느껴진다. 깊이 있는 자료 분석이나 현장 취재를 생각해보면 차라리 소설보다는 에세이 형식으로 문제를 다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