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삶을 살 것인지는 오로지 선택의 문제이다. 각자 나름의 선택에 대해 책임지며 사는 것뿐이다. 서로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각자의 선택을 인정하고 그대로 존중해주면 되는 거다.
예전에는 적정 나이에 결혼을 하고 늦지 않게 아이를 낳고 사는 걸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여겼다. 따라서 누군가 혼기가 차도록 결혼하지 못하거나 부부에게 아이가 없는 건 일종의 결핍상태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뉴노멀시대가 되었고 라이프스타일에 모범답안은 없어졌다. 비혼주의자가 많아졌고 굳이 비혼이 아니더라도 혼자 사는 사람, 또는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는 부부들도 많아졌다. 명절에 친척이 모여도 조카에게 장가 안 가냐고 묻는 건 실례가 된 지 오래다.
표준적인 라이프스타일에서 벗어나 다른 방식의 삶을 살려고 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뭐든 다수와 다른 길을 가려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갖지 않는 삶이 다른 삶보다 더 쿨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다.
그건 단순히 기존의 라이프스타일을 거부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이들의 삶을 수동적인 삶 또는 흘러가는 삶 정도로 평가절하하는 기저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선민의식의 핵심은 ‘삶의 질’이란 건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삶의 질을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답하지 못한다. 그 누구도 혼자 책을 읽고 여가를 즐기는 시간이 자녀를 육아하는 시간보다 가치 있는 시간이라고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의 질이란 노동시간을 법으로 정할 것인지를 두고 논쟁을 벌이던 시절에나 의미를 갖던 말이다.
쿨함의 상징이었던 히피도 먼지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에 있어 절대적으로 쿨한 가치는 없다. 무엇이 더 쿨한 건지 비교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건 비혼이나 무자녀를 결핍으로 보던 사고방식과 다를 게 없다. 정말 쿨한 건 각자 선택대로 살아가는 것뿐이다. 어떤 합리화도 없이.
이 영화는 철저하게 사랑을 다룬 이야기다. 장르를 따지자면 멜로영화다. 전반부는 해준(박해일)의 사랑이, 후반부에는 서래(탕웨이)의 사랑이 그려진다. 그리고 이 두 부분은 남과 여, 산과 바다, 만남과 상실, 관음과 노출의 대조 속에서 완벽한 형식미를 갖춘다. 먼저 등장했던 게 나중엔 어떤 대구법으로 돌아오는지 의미를 찾는 관객들의 유희 속에서 영화의 샷, 앵글, 구도는 하나하나 메타포로 기능한다.
안개는 해준의 테마다. 그래서 해준은 안약을 넣는다. 뛰어난 형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에 대한 진실은 보지 못한다. 서래가 증거를 없애기 위해 자신에게 접근한 것도 보지 못하고, 서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한 것도 보지 못한다. 해준에게 서래는 안개 속의 여자다. 그리고 그 안개가 걷혔을 땐 이미 서래도 자신처럼 붕괴된, 아니 자신보다 더 철저하게 붕괴된 뒤였다.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은 스스로를 붕괴시키면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처연하게 바닷가를 헤매는 해준을 보며 관객은 느낀다. 보기 좋고 예쁜 것만 아름다운 게 아니란 사실을. 그리고 새삼 깨닫는다. 결국 박찬욱의 영화였다는 것을. 2022년 한 해 봤던 영화 중에 가장 좋았던 작품.
문학보다 영화가 좋은 건 배우의 연기를 볼 수 있어서다. 소설 속 인물은 머릿속으로 그려질 뿐이다. 하지만 영화 속 인물은 배우를 매개로 살아 숨 쉬게 된다. 텍스트만으로는 절대 전할 수 없는 영역을 표현하는 거다.
한결같음을 미덕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없다. 동화처럼 단면의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중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부모를 마주하는 나와 아이를 마주하는 나는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는 소설보다 입체적인 인물 묘사에 유리하다. 하나의 문장으로 이중적 표현을 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배우의 연기는 그것을 가능케 만든다. 이 작품처럼 남성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성성을 보여줄 수도 있고 강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약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점차 양쪽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진정한 남성성이란 게 대체 무엇인지. 강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심지어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 설명하기보다는 그냥 보여줄 뿐이다. 배우의 연기로, 그리고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으로, 마치 “영화란 이런 걸 표현하는 거란다”라고 말해주는 것처럼.
도덕적 딜레마를 쉽게 생각했던 것 같다. 강요된 집단자살을 숭고한 희생으로 미화한 건 불편하다못해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우리에게는 소수의 희생을 당연한 걸로 생각하던 권위주의의 상흔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재림은 그의 초기작들('연애의 목적'이나 '우아한 세계')처럼 실제 옆집에 살고 있을 법한 평범한 인간군상을 다루는 것에 더 소질이 있는 것 같다. 한재림의 오래된 팬으로서 다음 작품에서는 왕이나 국토부장관이 아니라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정민이 박해수를 만난 순간부터 영화가 갈 길은 정해진다. 그 이후부터는 변명만 남는다. 왜 그 길로 가야만 하는지. 수리남이라는 배경과 기시감 어린 캐릭터들은 단지 그 길을 위해 소모될 뿐이다.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되는 건지 설명해주는 느낌.
윤종빈이 공작에서 선보인 서스펜스는 수리남에서도 자기복제된다. 공작에서의 언더커버가 황정민이었다면 수리남에서는 하정우가 그 역할을 맡는다. 절대권력자를 동요시켜야 하는 언더커버의 페이소스가 반복될 뿐.
물론 변명과 자기복제를 좇는 것만으로도 6시간은 금세 지나가버린다. 그만큼 재밌고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다(영화든 시리즈든 일단 재밌고 봐야 한다). 하지만 물 만난 고기, 아니 넷플릭스를 만난 윤종빈이라는 점에서는 아쉬움이 드는 것도 사실. 윤종빈처럼 젊은 천재형 감독이 벌써 자기복제를 하거나 쉬어가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직무유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