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예루살렘에서는 아이히만이란 사람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그는 수백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나치의 전범 중 한 명이었다. 태연히 수백만의 사람을 죽였던 경력을 생각한다면 그가 정신이상자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괴물의 모습을 상상하기 쉽지만, 재판을 받기 위해 사람들에 공개된 그는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한 인간에 불과했다. 수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의 심리 상태를 판정했지만 그의 정신적 상태는 ‘정상’을 넘어 ‘바람직한’ 성품을 보이기까지 했다. 더욱이 그는 유대인에 대한 광적인 증오를 갖고 있었거나 반유대주의 사상에 세뇌를 받은 상태도 아니었다.[각주:1]

재판의 참관인으로 참석하여 눈 앞에서 아이히만을 접했던 한나 아렌트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동시에 무자비한 수백만(600만 명이라고 추산)의 학살자가 될 수 있었는지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실 이 분석은 아이히만만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근대 이성의 완성이 눈 앞에 있다고 여겨졌던 20세기 서구 사회에서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어떻게 가능했는 지, 즉 ‘악의 평범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자 고민이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말’에 주목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의 언어가 매우 공허하고, 현실 인식에 심각한 괴리를 보이고 있으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하다고 분석했다. 아이히만이 나치의 언어 규칙을 철저하게 답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례로 유태인들의 강제 이주를 ‘재정착’, ‘동부지역 노동’ 등으로 불렀고, 학살은 ‘안락사 제공’, ‘최종해결책’ 등으로 명명했다.[각주:2] 나치 수뇌부는 의도적으로 스스로가 만든 인공적인 표현을 전국가적으로 통용시켰다.

본래 정상적인 인간들에게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다. 전쟁도 명분이 없으면 할 수 없다. 전쟁이라는 공식적인 살인도 이를 정당화해주는 명분이나 구호가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일방적인 학살은 더욱 그렇다. 2차 대전 말에 맨하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이 죄책감을 호소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치의 언어 규칙은 무자비한 ‘범죄’를 불가피한 ‘의무’로 만들어주었다. 유태인 학살은 체계적인 업무 중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얼마 전 영화 ‘변호인’을 봤다. 보통의 한 대학생을 일순간 북의 지령을 받고 활동하는 간첩으로 만들어버리는 공권력의 무시무시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공안당국이나 사법부가 사용하던 언어들도 마찬가지였다. 공안당국이 통용하던 언어 규칙들, ‘국가 전복 세력’, ‘반국가단체’, ‘빨갱이’, ‘간첩’, ‘적화통일’. 유죄를 선고 받았던 당사자들은 실제 반국가단체를 조직하지도 않았고 국가 전복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들은 빨갱이도 아니었다. 모두 현실적인 판단 기준과는 거리가 먼 언어들이었다. 영화 속 변호인이 법정에서 울분을 토하는 이유도 현실과 언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이는 지금도 달라진 게 없다. 기득권층은 사회의 건전한 비판 세력마저 ‘종북좌파’로 명명한다. 종북세력과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을 동일시 해버리는 사회의 언어 규칙 속에서 정당한 비판과 문제 제기마저 북의 지령을 받고 온 종북세력의 분열 조장으로 치부된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변호인에게 계란을 투척하던 할아버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멀쩡한 젊은이들을 상대로 종북 척결을 외치는 집회를 하고 계신다. 이들의 언어는 여전히 공허하다.

사실 언어는 현실을 완벽하게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말로는 에스키모인들의 십수 개가 넘는 눈에 대한 언어를 다 표현하지 못하는 것처럼 언어를 통한 현실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언어와 현실 사이는 늘 벌어져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극을 인지하고 ‘사유’하는 것이다.[각주:3] 아렌트는 언어와 현실 사이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만이 악을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방법이라 강조했다. 이를 ‘두려운 교훈’이라 했다. 아이히만은 실제로 자신이 수행하는 임무가 안락사 제공인지 아니면 학살인지 의심하지 않았다. 때문에 수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고, 종국에는 그마저도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아이히만이 학살자가 된 것도 80년대 무고한 대학생을 범죄자로 만든 것도 모두 ‘사유’가 결여된 까닭이었다.[각주:4]  사진이라는 것도 대상의 이미지를 있는 그대로 표상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은 대상이라 하더라도 렌즈나 필터, 필름에 따라 천차만별의 사진이 만들어진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언어를 매개로 보는 세상이 왜곡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현실과 그 대상에 조금이라도 더 접근할 수 있는 핵심이 되며, 이런 의식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타자와의 대화 속 언어는 전과는 전혀 다른, 현실의 힘을 담은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을 테다.

(영화 '변호인'을 보고)

  1.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79 [본문으로]
  2.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177 [본문으로]
  3. 영화 '변호인'에서 주인공이 부림사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간극을 알아차리고부터다. 북한과는 전혀 상관없는 국밥집 학생이 빨갱이 간첩으로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았을때 공안당국이나 주장이나 사법부의 견해가 얼마나 허황된 것이었는 지를 몸소 깨달았던 것이다. 이계기는 주인공을 속물 조세 변호사에서 인권 변호사로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본문으로]
  4.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김선욱 역, 한길사, 2006년, p391 [본문으로]

바로 지금, 내 앞에 놓여있는 노트북. 그렇다면 나는 이 요상하게 생긴 물건이 어떻게 노트북인지를 알게 되는 것일까? 굉장히 쓸데없고 할 일 없어 보이는 생각일 수도 있지만 철학, 아니 현재의 모든 학문의 시작은 이 같은 물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주 먼 옛날 플라톤 같은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해 답하기 위해 거창한 '이데아'를 이야기하기도 했고, 신학자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논증의 장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또 흄 같은 짖궂은 회의주의자들은 앞의 노트북 그 자체는 노트북을 보고 있는 시각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는 것(노트북의 실체는 정확히 알 수 없다)이라고 이야기 했고, 데카르트나 칸트는 노트북이 나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내가 노트북을 구성하고 있다고 발상을 뒤집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이 물음에 대해 어떤 답을 갖고 있을까? 지금의 학자들은 대부분 '대상'이나 '나' 자체보다는 그 둘을 특정한 형식으로 관계짓는 '구조'에 주목한다. 그동안 '나'와 대상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구조나 체계로, 즉 판 전체로 확대시킨 것이다. 이 같은 사조를 뭉뚱그려 '구조주의'라고 한다. '나'는 '대상'의 참된 속성보다는 '나'와 그 '대상'이 이루고 있는 총체적인 체계와 위치, 규칙 속에서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은 OK 사인이 영미권과 우리나라에서는 'ok'와 같은 긍정의 의미로 이해되지만, 일본에서는 돈을 의미하고 브라질에서는 모욕을 주는 욕설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는 이야기처럼 같은 모양의 제스쳐라도 각 사회의 약속 체계마다 완전히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사실 앞서 말한 구조주의는 바로 이 언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구조주의 학자들 중에서 언어에 대해 연구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몸이 영혼의 집인 것처럼 우리의 존재 또한 언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모두 언어 덕분이다. 내가 지금 눈 앞에 놓여 있는 노트북을 '노트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고, 그 노트북이란 사물을 블로그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 또한 '노트북'이란 말 때문이다. 물론 앞에 놓여져 있는 네모난 사물을 꼭 '노트북'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휴대용 컴퓨터'라고 부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언어적 약속에 의해서는 '사과'라고 부를 수도 있다. 사물과 언어의 관계는 임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때때로 '언어' 자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이다. 이는 언어가 우리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만들어주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 의식을 규정하는 거대한 체계, 규칙임을 의미한다. 내가 타이핑 하고 있는 이 네모난 물건을 '노트북'이라 부르는 것과 '휴대용 컴퓨터'라 부르는 것은 큰 차이를 가진다. '휴대용 컴퓨터'란 명칭은 다소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지만, '노트북'이란 명칭은 우리에게 공책이란 이미지를 그리게 만듦으로써 공책처럼 마음껏 가방에 넣고 휴대할 수 있는 컴팩트하고 편리한 느낌을 준다. 같은 사물이라도 그 명칭에 따라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는 천지 차이가 된다. 언어가 단순히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면 매순간 기업들이 새로운 상품에 대한 참신한 이름을 고안하기 위해 그토록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참신한 상품명이 상품의 매출액을 좌지우지 하는 사실은 단어 하나가 본래의 지시 대상에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주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동양에서는 동사 중심의 언어 구조를 갖고 있다. 의식적으로 행위, 관계에 중점을 둔다. 반면 서양에서는 명사가 중요시된다. 같은 동사라 할 지라도 명사의 속성에 따라 그 형식이 바뀐다. 따라서 동양과 달리 사물, 독립적인 개체에 중점을 둔다. 동양에는 be동사(독어로는 sein동사, 불어로는 etre동사)가 없는 것도 마찬가지다. 명사, 주어 중심의 서양 언어체계에서 be동사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풍부한 서술어 표현을 갖고 있는 동양적인 언어 구조에 be동사는 굳이 필요가 없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일찍이 동양에서는 행위와 관계에 대한 도덕론이 발달한 반면, 서양에서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중시하는 인식론, 형이상학 등이 발달했다. 또한 동양에서는 관계와 공동체에 대한 소속에서 자신을 보는 반면 서양에서는 비교적 독립적인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처럼 동서양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의 차이는 수천 년 동안 지속적으로 양쪽의 상이한 문화, 관습, 의식을 만들어냈다. 언어는 더 이상 우리 외부에 있는 개별적인 무엇이 아니라 그 어떤 것보다 더 깊숙하게 우리 안에 자리잡고 우리의 행위, 의식과 영향을 주고 받는 존재다.

그런데 초등학교의 원어민 영어 수업도 아니고, 대학생과 교수를 상대로 영어로 강의하라는 것은 한 마디로 '무식한' 자태다. 더욱이 역사나 국문학 등 과목을 가리지 않고 영어 강의를 독려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에 불과하다. 때문에 지금 강의실에는 국문 시를 영어로 배우는 참 요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얇은 사 고이 접어 나빌레라" 같은 표현에 대해 어떻게 영어로 설명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언어는 단순히 교수와 학생 사이에서 지식을 전달해주는 '도구'가 아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지식의 한 부분을 이룬다. 같은 내용이라 할 지라도 우리말로 강의하는 것과 영어로 강의하는 것은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우리말이 갖고 있는 언어 구조와 의미화에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무작정 우리말과 전혀 다른 맥락을 가진 영어로 강의를 듣고 이해하게 하는 것은 빵에 된장을 발라먹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대학의 영어 강의는 지식 전달이라는 목적은 물론 그 과정까지도 비효율적으로 만든다.

영어, 물론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세계화라 불리는 요즘 같은 세상에 영어를 잘한다는 것, 분명 큰 경쟁력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물불 가리지 않고 어디에서나 영어에만 '몰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실무적인 차원에서 영어가 중요하다고 해서 대학 강의까지 영어로 수업하게 만들 까닭은 없다. 대학은 기업에 양질의 인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인력 양성소가 아니다. 대학은 그 사회의 학문과 지성의 보고이다. 한국 사회라는 지형 아래 오랜 세월 축적된 학문, 지식, 교양이 이어져오고 덧붙여지고 새롭게 변용되는 공간이다. 그리고 언어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 곳에서 굳이 '영어교육'에 몰입할 필요가 있을까. '영어몰입'은 영어 수업이나 기업, 외무 등 실무적인 차원에만 집중해도 충분하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국가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의 '모든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