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은 조커의 행위를 미화하지도 않았고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이 작품의 서사를 그대로 따른다면, 조커는 약자(또는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하는 자가 아니다. 단지 우연한 계기로 군중적 분노의 상징이 됐을 뿐이다. 중요한 건 우연성이다. 토드 필립스는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오마쥬했다고 밝혔는데, '모던 타임즈'에서도 이 우연성에 대한 장면이 나온다.

길가에서 한 트럭이 깃발을 흘리고 갔고 채플린은 그 깃발을 돌려주기 위해 깃발을 흔들며 트럭의 뒤를 따라가는 순간, 공교롭게도 채플린의 뒤로 대규모 집회 참석자들의 행진이 이어진다. 얼핏 보기엔 채플린이 집회의 주동자처럼 보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경찰은 채플린을 주동자로 오인하고 그를 체포하는 장면이 나온다.(https://www.youtube.com/watch?v=idB8FqlYMqw)

마찬가지로 조커가 머레이를 죽인 건 약자의 분노를 대신 발산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을 조롱하고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산산조각 내버렸기 때문이었다. 개인적 감정에 의해 우발적으로 총을 쏜 것뿐이다. 조커가 군중의 환호를 받을 때 희열을 느끼는 것도 그가 대리자로서의 어떤 힘을 가져서가 아니다. 단지 사람들이 자신에게 집중하고 열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커는 본래 '관종', 그러니까 관심종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서의 꿈은 코미디언이지만 정작 아서의 상상 속 머레이쇼에서 아서는 청중을 웃기지 않는다. 단지 청중의 박수와 격려를 받을 뿐이다.)

그리고 조커가 관종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를 관종으로 만든 건 아니다. 부모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학대 같은 가정폭력은 안타깝지만 사회적 안전망의 경계에 (혹은 그 밖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선진 사회라 하더라도 가정 내에서 이루어지는 학대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뿐이다. (작품을 보고 유추해보자면) 나중에는 격리 조치가 취해지긴 했지만 아서도 어린 시절 학대를 받았고 그로 인해 정신쇠약과 틱 장애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아서가 조커로 변하게 된 것을 순전히 세상 탓으로 돌리기에는 그 과정이 너무 병적이고 자폐적인 계기들로 채워져있다.

물론 사회적인 장치가 그를 보호해주지 못했던 부분도 분명 간과할 수는 없다. 치료시설에 대한 세제 지원이 줄면서 아서가 상담치료와 약 처방을 받지 못하게 됐고, 피고용자에 대한 아무런 보호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직장에서 손쉽게 해고가 됐던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아서에서 조커로의 변화를 촉진시킨 결정적인 부분이었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아서가 총을 갖게 된 것도, 총으로 쏴죽인 이들이 금융가의 직원이었던 것도, 토마스 웨인이 자신의 생부라고 착각했던 것도 모두 구조적 문제와는 상관없이 그저 우연히 발생한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봉준호의 '기생충'이나 '설국열차'와도 비교를 하지만, 애초에 이 작품은 계급론으로 읽힐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계급론을 주제로 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이 작품을 본 후의 불편함은 '기생충'을 본 후의 불편함과는 좀 다르다. '기생충'을 보고 불편함이 드는 건 작품이 꼬집고 있는 불편한 진실이 곧 현실과 다르지 않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커'에서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건 양극화나 계급 갈등이 아니다. 조커라는 캐릭터, 그러니까 '광기' 때문이다. 아서가 점점 극단으로 내몰리게 되는 상황에는 공감하지만, 그것이 머레이를 총으로 쏴 죽이는 행위를 정당화해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은 호아킨 피닉스가 표현한 광기로 그 부족한 인과관계를 메우려 하고 있고, 관객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일종의 불편함(혹은 카타르시스)을 느끼는 것이다.

아서가 서서히 조커로 변하는 모습은 이를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머릿속에 많은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해준다. 광기, 사회, 폭력, 약자 등등.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도 개운함보다는 찝찝함이, 명료함보다는 복잡한 심경이 드는 것이다. 이런 작품을 단순하게 계급론으로 환원시키는 건 아쉬움이 든다. 좋은 작품이란 궁극적으로 반드시 어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가치관을 품고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조커'를 계급적 저항의 아이콘으로 추켜세울 필요도 없고 살인과 범죄를 미화하는 선정적 캐릭터로 깎아내릴 필요도 없다. 사실 이 영화는 이런 논쟁을 배제하고 보더라도, 그러니까 연기, 미장센, 음악 등 작품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뛰어난 영화다. 외연적 확장도 좋지만 때로는 그것이 영화를 보는 눈을 보다 편협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