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에서 점심을 먹을 때마다 일종의 눈치싸움이 벌어지곤 한다. 소위 ‘통일’을 좋아하는 윗분들 때문에 벌어지는 치열한 눈치싸움 말이다. 본인이 먹고 싶은 메뉴가 있지만 섣불리 입 밖에 내면 안 된다. 가장 먼저 해야 하는 건 ‘대세’를 파악하는 일이다. 눈치를 최대한 가동하여 현재 대세를 타고 있는 메뉴가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내가 먹고 싶은 메뉴를 말해도 되는지 판단할 수 있다. 먹고 싶은 메뉴가 대세인 메뉴와 다르다고 바로 포기할 필요는 없다. 나와 같은 메뉴를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이 유의미한 숫자에 이르면 함께 제2의 메뉴 그룹을 구성하면 된다. 예를 들어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가 짬뽕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보다 적다고 해서 짜장면을 포기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짜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이들의 숫자 또한 꽤 많아져서 한 무리를 이루게 된다면 눈치 볼 것 없이 그 무리에 편승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중요한 건 나의 선택이 다수의 선택과 부합되느냐는 문제다. 제1의 메뉴든 제2의 메뉴든 다수의 선택과 부합된 선택을 해야만 음식을 주문할 때 눈총받는 일이 없다. 예를 들어 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짜장면이나 짬뽕을 주문했는데 나만 홀로 우동을 주문한다면 나는 주변으로부터 무언의 압박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눈치가 없네.’, ‘개념이 없어.’, ‘특이한 사람이군.’, ‘저 사람 때문에 음식이 늦게 나오면 어쩌지?’ 하는 따가운 시선들을 받게 되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남들과 같은 돈을 내고 먹는 점심인데, 음식 메뉴 고르는 것조차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니. 그래서 요즘 직장인들은 점심 메뉴를 통일시키는 상사를 혐오한다. 눈치 보지 않고 먹고 싶은 음식을 주문해서 먹는다. 그래야만 점심시간이라는 귀중한 권리를 오롯이 향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상황도 비슷한 것 같다. 각자가 어떤 가치관과 어떤 생각을 갖고 있든 선거 때마다 주어지는 선택지는 제1당의 후보 아니면 제2당의 후보 두 가지뿐이다. 물론 그 외의 선택지도 있긴 있다. 제3당의 후보 혹은 제4당의 후보, 아니면 아무 당도 없는 후보까지. 하지만 이들의 표를 찍는 일은 거의 없다. 점심 메뉴를 통일하려는 눈치싸움 속에서 제3의 메뉴, 제4의 메뉴는 사장되는 것처럼 제3당의 후보, 제4당의 후보를 찍는 표는 사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표면적으로는 아무도 제3의 선택, 제4의 선택을 막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점심 메뉴를 고를 때도 주변의 압박과 상관없이 끝까지 나만의 메뉴를 고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서도 대세의 흐름이 어떻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만의 가치관과 소신으로 후보를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자기검열이라는 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점심 메뉴를 내 마음대로만 하지 않는 것은 주변의 눈총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검열 때문이고, 마찬가지로 선거 때 낙선할 가능성이 큰 후보에게 표를 주지 않는 것도 내 표를 사표로 만들지 않으려고 하는 일종의 자기검열 때문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게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내가 지지하는 정당 또는 후보자가 그만큼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 또한 당연한 권리다. 예를 들어 정의당의 지지율은 꾸준하게 10%를 상회하고 있지만, 실제 정의당이 국회에서 갖는 의석수는 5석밖에 안 된다. 정의당 지지자라고 하더라도 정작 선거에서 강요받는 선택지는 제1당 아니면 제2당 두 가지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어야 하는 건 이 때문이다. 사람은 저마다의 다양한 가치 판단, 신념 등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대리해줄 정치세력을 찾거나 만들지 못하고 있다. 선거 때마다 거대 정당의 독식 구조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깨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만큼이나마 다양한 정치세력들이 제도권 내로 진입해야 한다. 그래야만 억지로 통일된 점심 메뉴를 먹는 일 없이 오롯이 자신이 먹고 싶었던 점심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