팟캐스트 '시네마운틴'에서 장항준은 이런 말을 했다. "질곡의 현대사를 같이 살면서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소재로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하고, 어떤 사람들은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욕해버리고 말고, 또 어떤 사람들은 (기득권이 되어) 그 시대를 즐기기도 했는데, 저 구석에서 이 모든 걸 보면서 킥킥거리고 웃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인 것 같다."

장항준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현대사의 한 단면을 기차라는 공간으로 재현한 후 다양한 인간군상과 그 면면을 신랄하게 폭로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발견된 각자의 뒤틀린 욕망이라는 게 상황을 얼마나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양상으로 만들어가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를 단순하게 87년 민주화 항쟁처럼 강자에 대한 약자의 승리에 비유하는 건 반쪽짜리 해석이다. 기차에 타고 있던 국회의원(박영규)도 한때는 독재에 맞섰던 민주투사였다거나, 주인공 허봉구(김승우)는 그저 라이터를 되찾아올 목적이었을 뿐 대의에는 무관심했던 사실만 봐도 이 영화가 이런 일차원적인 해석을 얼마나 경계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영화에 등장하는 다수의 승객들은 시점마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소수 건달들의 횡포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다가, 나중에는 분노해서 들고 일어나지만, 정작 중요한 지점(열차 지붕으로 올라가야 하는)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을 주인공에게 떠넘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언론과 인터뷰할 때는 자신이 모든 것을 해낸 것처럼 무용담을 늘어놓는 것이다.

주인공 허봉구도 약자들의 영웅과는 거리가 먼 인물에 불과하다. 그의 유일한 무기는 돌머리, 즉 무식함 또는 무능력함이다. 가진 게 없으면 잃을 것도 없다. 그래서 가진 게 없는 인간이 가장 무서운 인간이 되기도 한다. 300원짜리 라이터가 그의 텅 비어있었던 심연의 밑바닥이었다면, 기차의 소동은 그로 하여금 밑바닥을 치고 올라가게 만든 계기가 된 셈이다. 기차를 멈추게 하고 승객들을 구하게 된 건 미필적 고의에 의해 우연히 얻어진 결과일 뿐이다.

사실 풍자라는 형식은 필연적으로 기득권 또는 강자에 대한 비판으로 환원될 수밖에 없다. 풍자의 대상이 되는 시대나 사회구조는 결국 기득권이 만들고 유지하려는 양식이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철저하게 세태의 단면 단면을 조소할 뿐,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는다. 가치판단이나 선악의 개념과는 거리를 둔다.

현대사를 하나의 게임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의 시점은 그 어떤 쪽의 플레이어에도 속해 있지 않다. 장항준의 말대로 한쪽 구석에서 제3자의 시선으로 플레이어들을 희화화할 뿐이다. 그래서 더 차갑고 시니컬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 (예를 들면 장진의 영화들처럼) 일말의 인간미나 따스함을 남겨두던 당시의 한국영화들과 달리,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적 본질에 가까웠던 영화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하지만, 블랙코미디는 이를 전복시켜야 한다. 세부적 표현은 희극이어야 하지만 총체적 분위기는 비극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조폭을 소재로 한 희극적인 연출은 이따금 진부한 한국식 코미디라는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그건 일부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갖는 의미는 그 너머에 있다. 감독 장항준보다는 입담꾼 장항준을 더 좋아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그저 그런 영화 중 하나로 치부되기에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