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불편한 진실이라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이 접할 수 있는 건 신문이나 TV 뉴스처럼 기성 언론의 정제된 정보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믿고 싶은 정보를 찾는 게 용이해졌다. 소수의 음모론이라 하더라도 거짓 근거로 살을 붙여 그럴듯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수히 많은 정보가 떠도는 인터넷에서 사람들은 믿고 싶은 정보만 수용하려 한다. 예를 들어 확증편향이나 인지부조화 이론처럼, 선거에서 지지했던 세력이 패배한 사실을 받아들이기보다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주장에 동조하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편한 진실을 수용하지 않고 '탈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다.

탈진실로 인한 충돌은 사상적 대립보다 종교 갈등에 가깝다. 같은 사실을 두고 다른 견해를 갖는 게 아니라 애초에 다른 사실을 기반으로 다툼을 하기 때문이다. 의견이 다를 땐 대화가 되지만, 믿고 있는 사실이 다를 땐 대화 자체를 할 수 없다. 변증법적인 관계가 아니라 극단적인 갈등만 있을 뿐이다.

인터넷은 토론보다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인터넷은 다른 의견을 수용하기보다 믿고 싶은 의견을 재확인하는 공간에 가깝다. 생산적인 토론은 찾아보기 힘들다. 뉴스 댓글만 봐도 서로에 대한 조롱과 욕설뿐이고, 게시판 커뮤니티는 배타적이고 자가증식적인 친목질만 하고 있다. 탈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건 진영을 떠나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사실 탈진실은 새롭게 등장한 어떤 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사회나 내재되어 있던 특성이기 때문이다. 굳이 '상상의 공동체' 같은 복잡한 예를 들지 않아도 된다. 인스타그램만 하나만 봐도 탈진실은 만연해 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사진은 그대로의 모습보다 보정된 이미지가 많다. 턱을 깎거나 눈을 키우거나 뽀얀 피부를 만들어서 본인보다 예쁘게 나온 셀카를 올리기 때문이다. 인스타그램의 이미지는 실재하는 것과 다르다.

하지만 그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인스타그램의 셀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보정은 당연히 있겠거니 생각하고 사진을 본다.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수준이 있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인스타그램 주인의 심정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욕망과 이해관계는 끊임없이 탈진실을 만들어내고, 인터넷 보급은 그것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다. 인터넷에 가짜 정보들이 돌아다니는 걸 인위적으로 막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건 탈진실이나 인터넷이란 매체의 속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탈진실이 거스르기 힘든 일종의 경향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개인의 차원에서 다뤄야 할 문제일 수밖에 없다. 유튜브에 가짜뉴스가 판친다고 해서 그것을 일일이 솎아내거나 유튜브 자체를 폐쇄할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탈진실 자체라기보다 그것이 무분별하게 수용될 때 발생한다. 결국 수용자 개인이 분별력 있게 가려 듣는 수밖엔 없다.

필요한 건 비판의식이다. 말은 거창하지만 비판의식이란 것도 특별한 건 아니다. 인스타그램을 볼 때처럼 사진의 보정 여부를 한 번 의심해보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 멍하게 앉아 TV 뉴스를 보던 시절은 지났다. 서로가 서로의 미디어가 된 세상에서 비판의식은 실존의 필수 조건이 된 지 오래다. 진영논리에 따라 휘둘리는 좀비들처럼 최소한의 고민도 없이 무분별하게 정보를 받아들일 때, 사람들은 탈진실의 노예가 되고 아렌트가 말하는 무사유의 인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