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을 이제 마무리하며,
과연 올해에 나에게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었을까 곰곰히 생각을 해봤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혼자 배낭여행을 해봤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았다. 국제미아가 될 뻔한 위기도 몇 차례 겪고, 금발미녀의 꾀임에 빠져 강도를 당할 뻔도 했고, 처음으로 많은 외국인들과 말을 섞어 봤고, 인종차별 같은 것도 당해봤고, 택시기사의 바가지에 실랑이도 벌여봤고, 잠에서 깨자마자 푸른 눈의 미녀에게 'Good morning, Guy!'(중요한 것은 boy가 아니라 guy였던 것)소리도 들어봤지만, 무엇보다 기억에 남았던 사건은 소매치기를 당했던 일이 아니었나 싶다.
소매치기 조심하란 말, 지겨울 정도로 들으면서 내 나름대로 조심하며 다녔는데 긴장이 풀렸는지 돌아오기 바로 몇 일 전, 부다페스트에서 캠코더를 소매치기 당했다. 기차 안까지 쫓아들어와 그렇게 교묘한 수법을 쓸 줄이야. 캠코더 값도 값이었지만 여행 다니면서 찍어뒀던 모든 테잎이 없어졌다는 생각에 너무도 안타까웠다. 몇 년 동안 애지중지 보물 1호로 여기던 캠코더였는데 정말 추억이 많았던 캠코더였는데. 지금도 아주 가끔 잠자기 전 머릿 속에 떠올라 한숨을 푹 쉬게 만든다.
지금도 이렇게 아까워하는데 그 당시 캠코더를 소매치기 당했던 사실을 막 알았을 때, 그 때의 심정은 오죽했으랴. 기차를 타고 있었는데 정말 누구한테 하소연도 못하고 혼자 입 꾹 다물고 아쉬움과 슬픔과 분을 삭혔다. 눈은 뻘겋게 충혈되고 어느새 눈물은 앞을 가리고. 낯선 이국땅에서 정말 서러웠던 기억이었다. 남들은 그깟 캠코더가 뭐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난 몇 년 간 거의 매일 가방 속에 캠코더를 갖고 다니면서 내 스무살 초반의 추억들을 고스란히 담았던 나에게는 정말 각별했던 물건이었기에 아쉬움은 더욱 크기만 했다.
그래도 지금은 흔치 않은 좋은 경험했다손 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한 체념(?), 빨리 잊는 법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일을 당한 날 숙소에서 한국사람을 만나 소매치기 당한 이야기를 해줬는데, 단지 말을 푼 것 뿐만으로도 얼마나 후련하고 무덤덤해질 수 있는지 새삼 사람과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 그래도, 경험 어쩌구 저쩌구 자위하는 것은 집어치더라도 제발 새해에는, 아니 새해말고 앞으로 평생 이런 사건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실수로 어디 두고 온 것도 아니고, 두 눈 멀쩡하게 뜬 상태로 헝가리 악당들에게 당해버렸다. 요즘 유행하는 '지못미'라는 말만큼 와닿는 말이 없다. 정말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캠코더야.
처음 살 때가 기억 난다. 처음 손으로 카메라를 잡고 집안 이리저리를 돌아다녔다. 테이프를 사서 찍었다가 지우고 다시 찍고를 반복했다. 계속 갖고 싶었던 것이었기에 처음 포장을 뜯고 난 후 지금까지 내내 애지중지 아꼈다. 조금이라도 흠이 가면 다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처럼 가슴아파했고, 하루에도 수 십 번씩 닦고 또 닦아주었다. 추억도 많았다. 친구들이랑 여행간 것도 찍었고, 학교에서는 여러가지 재밌는 동영상들도 만들어보았다. 과제로 인터뷰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했고, 이곳저곳 혼자 돌아다니면서 재밌는 것들을 많이 찍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혼자 떠난 유럽여행의 추억들을 담고 있었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잃어버린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정말 속상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기차를 바꿔타고 돌아가 부다페스트 한 곳 한 곳을 다 뒤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떻게든 찾고 싶었다. 하지만 속만 타오를 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누구한테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렇다고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조차 있지 않았다. 지긋이 눈을 감고 혼자 당황함과 아쉬움을 삭힐 수 밖에는 없었다. 혼자 여행을 왔다는 것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내 딴엔 엄청나게 큰 일을 당해도 어느 누구에게 말한마디 못하고 위로 한마디 듣지 못했다. 하지만 별 수 없었다. 그저 계속 계속 혼자 마음을 푸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점점 마음도 가라앉았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좋은 경험했으려니 하고 좋게 생각하려고 하는 여유까지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쉽다. 구린내나는 저먼 이국땅의 어느 암시장에서 뒹굴 내 캠코더를 생각하면 슬프다. 안타깝다.
정들었던 내 캠코더야, 마지막까지 나에게 경험이라는 뜻 깊은 선물까지 주고 떠난 내 캠코더야, 부디 좋은 주인 만나서 이 넓디 넓은 세상 훠이 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