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 Sixteen Nineteen Say
혼자생각 |
2008/08/16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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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그렇다고 성당이나 절에도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개신교에 대한 추억을 많이 가지고 있다. 자그마치 6년 동안이나 미션스쿨에서 학교생활을 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종교가 없으셨다. 그래서인지 나 또한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그러다가 개신교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종교라는 것을 처음 접해보게 되었다. 아침 조회마다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했다. 수업시간표에는 예배 시간도 있어서, 교회로 올라가 다 같이 예배를 했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했다. 거북스럽기보다는 접하지 못했던 처음 해보는 것에 대한 낯설음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이나 신앙을 갖진 않았지만 딱히 거북스럽지도 않은 하루하루였다.
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개신교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게 한 저 노래. 학교에서 많이 불렀던 복음성가 중 하나였다. 목요일 아침 1교시는 전교생이 교회에 모이는 예배시간이었다. 그 예배 시간 중 2,30분 남짓은 밴드와 선생님의 열창으로 복음성가를 부르는 시간이었다. 계속 반복적으로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복음성가는 처음 듣는 곡임에도 불구하고 멜로디도 낯설지 않고 무엇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나같이 딱히 ‘믿음’이 없던 아이들도 자신도 모르게 그 복음성가를 흥얼거릴 때가 많았다. 그리고 찬송가와는 달리 신나는 노래들이 많았다. 교회 강당에 모인 대부분의 아이들이 노래를 따라 불렀는데 모두 신앙심이 깊어서 그랬기보다는 그냥 일주일 중에 한 번 서로 깔깔거리면서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즐거웠다. 이것이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Roman Sixteen Nineteen Say'로 시작하는 노래도 그런 노래들 중 하나였다. 노래가 가리키고 있는 것이 어떤 성경 구절이고 그 성경 구절은 무슨 교훈을 가지고 있는지 하나도 몰랐다. 딱히 알 필요도 없었다. 수험생이라는 틀에 박힌 일상에서 오는 고단함을 날려버리기라도 하듯 그냥 서로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하면서 목청껏 노래를 불러대는 것이 좋았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서로 그때의 추억을 못 잊어한다.
아침 조회 시간에는 반 아이들이 담임선생님과 기도를 했다. 나는 그 기도가 좋았다. 반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담임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간절한 진심이 느껴졌고, 몸이 안좋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긴 친구가 생기면 반 전체가 그 친구를 위해 눈을 감고 기도해주는 것도 좋았다. 한 번은 내가 우리 반의 기도를 맡아서 한 적이 있었다. 한 번도 기도를 해보지 않았던 내가 여기저기 귀동냥으로 들었던 기도문들을 떠올리며 기도를 시작하자 친구들과 담임선생님이 ‘오~’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던 기억도 있었다. 찬송가 경연대회에서 되든 안 되든 친구들 전체가 하나가 되어서 합창을 하는 것도 좋았고, 종교 과목 시간에 성경의 순서를 외우는 법을 알려준다며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로 시작하는 노래를 불러주신 목사님의 구수함도 좋았다. 아침 조회시간에 찬송가와 성경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지막지한 몽둥이질을 받아야만 했던 것도 싫지 않았다. 담임선생님과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회에 간 날, 새로운 신자를 환영한다며 수백의 사람들 앞에 나 홀로 일어서 있었던 불편했던 일요일도 이제는 스윽 웃음이 나온다. 아, 생각해보니 그때 나를 교회로 끌고 가다시피 했던 친구는 선교를 많이 했다고 교회에서 라디오를 받았다. 앙큼한 녀석.
당시 나와 같은 또래에 있던 한 학생은 자신이 다니던 학교를 상대로 종교의 자유를 문제 삼아 소송을 걸었던 사건이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가 개신교 미션스쿨이었다는 것은 나같이 신앙을 갖지 않았던 친구들에게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착하디착한 친구였던 학급 선교부장이 대학 입시를 앞두고 불안해하던 우리를 위해 조회시간에 해주던 기도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그 누구의 격려보다도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었고, 거대한 교회 안에서 목청 터져라 노래를 불러댔던 예배 시간은 입시로 인해 막혔던 우리의 가슴을 확 풀어주는 듯 했다. 한편에서는 교회의 목사가 상습적으로 성추행을 저질러왔다는 뉴스가 보도되곤 하지만, '경건한' 신앙 생활을 학생들 앞에서 몸소 실천하시는 학교의 선생님들을 보면서 종교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얼마나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직접 실감할 수도 있었던 귀중한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 법을 배웠다. 친구가 절실한 개신교 신자이면 그런대로, 친구가 절을 다니는 불교 신자라면 또 그런대로, 친구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또 그런대로, 서로 다르지만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손목에 염불처럼 생긴 불교 팔지를 한 친구이건, 종교를 갖지 않은 친구이건 교회 강당 안에서 별다른 생각 없이 서로가 소리를 지르는 서로에게 웃으면서 ‘Roman Sixteen Nineteen Say!'라고 외치며 노래하면 그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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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비과세?
혼자생각 |
2007/07/21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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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의 국민은 4가지 의무를 다해야 한다. 첫째 국방의 의무, 둘째 교육의 의무, 셋째 근로의 의무, 넷째 납세의 의무. 이들 중 납세의 의무, 우리나라 국민 중 소득을 버는 국민이라면 누구든지 세금을 내야 한다. 말단 청소원부터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까지도 소득을 낱낱이 신고하여 그에 합당한 세금을 납부한다. 그런데 유독 한 종류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러한 납세의 의무에서 자유롭다. 바로 종교인들이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비과세 대상으로 간주되어온 이러한 종교인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혀 큰 논란이 일고 있다. 기독교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있다. 누구든지 자신이 벌어들이는 것의 십분지 일을 교회에 성금으로 내는 관습을 말한다. 설령 독실하지 않더라도 상당한 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이런 십일조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더군다나 산업화의 이룩으로 시민들이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갖게 되면서 이러한 십일조나 성금을 통해 교회가 벌어들이는 수익 또한 그 규모가 막대해졌다. 특히 여의도 순복음교회 같은 유명하고 규모있는 교회들은 성금으로 거둬들여지는 수익이 어마어마하다. 이미 세금을 납부할 수준의 경제력은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교회의 목사들이 납세를 거부하는 주된 이유는 '성직'이라는 세속에서 벗어난 특수한 종교적 직업임을 인정 받고 싶어서이다. 즉,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성직'을 단순한 근로나 노동으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성직자란 자고로 다른 많은 이들의 존경과 경의를 받는 직업이다. 즉, 많은 이들 앞에서 스스로 모범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러한 납세와 같은 의무 또한 앞서서 이행함으로써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성직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하진 않을까. 소득이 있으면 세금을 내는 것은 당연하다. 각종 공공서비스의 혜택을 받으면서 납세능력이 충분히 있는데도 납세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비약하다. 실제로 이미 상당수의 개신교 목사들은 자발적으로 세금을 납부하고 있다. 내부적으로도 종교인들의 비합리한 비과세 실태에 자성적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종교계의 비과세 실태는 다른 나라들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현상이다. 우리나라보다 단연 개신교나 가톨릭을 우선시하는 미국이나 유럽 국가들에서도 소득에 대해 세금을 내는 것을 마땅히 여겨 종교인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계의 비과세 실태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보이는 까닭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일부의 전문가들은 현재의 종교계 비과세 관행이 일제시대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일제시대 때 조선총독부는 종교계에 대한 회유책으로 비과세 특혜를 내걸었는데, 이 때 대부분의 종교단체들이 조선총독부와 영합하면서 비과세 특혜를 입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일종의 관행으로 굳어져 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른쪽에서 생각해보자. 현 정권이 강경하게 밀고 있는 정책 중 하나가 사학법이다. 사학재단에 대한 법적 간섭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학은 이미 수많은 비리에 연루되어 있다. 이들 사학 중에서도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종교재단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교재단에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종교계에 대한 비과세 철폐 방침은 이러한 종교재단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한 방안으로도 생각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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