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운동권'에게 고한다
혼자생각 |
2008/05/29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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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 택시를 탔다. 적막한 택시 안에서 라디오 뉴스가 또렷하게 들렸다. '지금 이 시간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로 인해 종로와 동대문 일대 도로가 정체되어있습니다....광화문 앞과 종각까지의 도로는 마비 상태입니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에이, 아무리 시위라지만 일하는 사람들까정 방해하면 안되지." 세상의 민심을 가장 잘 읽는 사람들이 바로 택시 기사 아저씨들이라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촛불집회에 나선 시위대를 향해 혀를 찼다. 당연히 국민들의 우려를 대신해 행동하고 있는 촛불집회 시위대를 두둔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일리있는 말이었다. 아무리 촛불집회이고 시위이고 좋지만, 최소한 생계에 바쁜 다른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행동은 되도록 삼갔어야 했다. 의도야 어떻든 차로를 모두 막고 행진을 벌이는 것은 좀 자제했어야 했다. 촛불집회가 외신들에 의해 보도되기까지 할 정도로 호응을 얻었던 점은 촛불이 담고 있는 '평화'의 덕이 컸다. 그런데 이 평화시위를 무단 차로 점거 등과 같은 불법시위로 전락시켜서는 안 될 것이었다.
오늘 아침 강의를 들으러 강의실에 들어섰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 몇몇 학우가 들어오더니 전단지를 나눠주면서 오후에 있을 학생총회와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헌데 집에 와서 촛불집회에 대한 뉴스를 보던 도중 그 학우가 나누어주었던 전단지가 민주노동당이 배포하는 선전물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수하게 학생회에서 만든 전단지 같았는데 아니었다. 물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한구석이 찜찜한 기분이었다.
'배후세력이 있다.' '불건전한 세력이 집회와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현재 이명박 정권이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들이다. 집회를 통한 국민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보다는 집회에 배후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구실로 오히려 집회에 참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을 강제 진압하고 있다. 물론 평화로운 촛불집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참여자들을 강제 연행하는 것은 과잉 진압임이 분명하지만 배후세력이 있다는 현 정권의 음모설은 과연 '설'에 불과한 것일까.
'운동권' 진보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급진적인 색깔을 갖고 있는 사람들, 우리는 그들을 흔히 '운동권'이라 부른다. 대표적인 정당으로는 민주노동당을 꼽을 수 있겠고, 민주노총, 전교조, 한총련 등의 세력 또한 모두 소위 '운동권'에 속한다. 87년 이후 급격히 진행된 민주화로 잠깐 그 뚜렷한 노선을 잃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거세진 이후 다시금 세력을 가다듬고 응집하여 우리 사회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그들이다. '경쟁'이 점차 중요시되는 사회에서 '평등'을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는 분명 우리 사회에 꼭 필수적인 요소다.
순수한 시민들의 집회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선 안된다.
하지만 최근의 이른바 '운동권'의 행동은 정말 실망스럽다. 그들의 고질적인 행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현 정권에 반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시민들이 조금이라도 응집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항상 그들이 나타난다. 어쩌면 시민들의 순수한 행동들을 그들의 정치적 야욕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그들의 버릴 수 없는 습성인가보다. 6여 년 전 미군 장갑차 사건 때도 그랬고, 한미FTA에서 지금의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 집회까지, 과연 진보가 맞나 할 정도로 그때만큼은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감정을 교묘히 건들여 자신들의 정치 구호 아래 이용해버린다.
문제는 더 있다. 지금의 정권의 그들과 정치적으로 정반대의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이다. 운동권 그들이 얼마나 완벽한 논리를 갖춘 주장을 펼지라도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세력이 그들의 주장에 수긍해줄 가능성은 제로다. 그들과 정권은 상극의 색깔을 가지고 있다. 서로의 서로에 대한 신뢰가 전무하다. 이런 그들이 촛불집회를 전면에 나서 선동하고 주도한다면 과연 이 집회의 효과가 나타날까 의문이다. 오히려 지금 정권이 떠들고 있는 것처럼 '배후세력이 있다'는 식으로 공권력에 의한 과잉진압의 구실이 될 뿐이다. 그리고 정권의 무분별한 시위 진압은 시민들과 정부 사이에 감정과 폭력만이 얼룩지도록 만들 것이 뻔하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바도 일리가 있는 논리다. 하지만 그 논리를 사회에 접목시키는 방법과 과정이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시민들의 전면에 나설만한 권리도, 시민들과 정권의 대립을 과격하게 만들 권리도 없다. 단지 사회의 한 부분에서 그들 나름대로 그들만의 목소리만 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를 시민들의 구호로 쓸 것인가는 그들이 아닌 시민들의 몫이다.
더 이상 '중심 없는 시위'를 더럽히지 마라.
'운동권'은 더 이상 시민들의 순수한 촛불집회를 이용하고자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중심없는 시위로 큰 반향을 낳고 있다. 이전까지의 시위나 학생운동에서는 중심 역할을 하던 배후세력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의 발달로 정치에 대한 시민 참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 중심이 없고, 주동자도 없고, 선동세력도 없다. 시민들 각 개인의 참여적 행동의 의지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인터넷과 모바일 통신은 단지 그 의지들을 하나로 응집시켜주는 역할만을 담당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집회에 외신들은 앞다투어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 아름다운 시민들의 참여를 그들의 야욕으로 얼룩지게 해서는 안된다.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는 성스런 성역이다. 그 누구도 이 영역을 침범할 수 없다.
미국의 위험성 높은 소를 수입하려는 정권을 말리고 싶은 그 간곡함만큼이나 순수한 촛불집회를 더럽힐 여지가 있는 운동권 그들에게도 간곡하게 말하고 싶다. 제발,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용기있는 행동들이 헛되는 일은 없도록 신중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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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반항아
혼자생각 |
2008/05/2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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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의 급식에서는 미국산 쇠고기를 절대 쓰지 않을 것입니다.' 요즘 각 학교 교장선생님들의 훈화 말씀에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란다. 하긴, 요즘 그 어떤 한마디보다도 학생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주는 말일지어니.
이전까지 길거리 시위는 주로 대학생들과 20대의 몫이였다. 기를 쓰고 미국으로부터 쇠고기를 들어오려는 지금의 정권도 2,30년 전에는 독재정권에 맞서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의 전면에 나섰던 대학생들로 채워져있다. 그리고 불과 십여 년 전만하더라도 대학의 캠퍼스들은 감옥을 연상케할 정도로 높은 벽으로 캠퍼스 내부를 감싸고 있었다.
그 후, 대학 캠퍼스의 높은 벽들은 민주화의 바람 아래 허물어졌다. 그리고 대학생들에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예전처럼 대학 공부는 접어두고 머리에 띠를 두른채 거리로 나와 시위하는 모습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대신 대학생활은 치열해졌다. 민주화가 이루어진 직후 무섭게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의 바람은 대학생들마저도 바꾸어놨다. '요즘의 대학생들에게는 뜨거운 피가 없어.', '캠퍼스의 낭만이 없어졌어.' 요즘의 대학생들을 보고 사회의 어른들이 혀를 차며 하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 것이 어디 대학생들의 탓인가. '나이가 40을 넘어선 뒤로는 세상에 대해 투덜거려선 안 된다.'란 말도 있다. 대학생들로 하여금 대학생활 낭만을 만끽할 여유를 빼앗아간 것은 지금의 세상을 만든 그들 자신이 아닌가.
그러던 최근, 대학생들이 당장 졸업 후의 먹고 살아갈 문제에 대해 매달려 있을 무렵, 이번에는 10대들이 좀더 본질적인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학교 울타리에서 벗어나 거리로 나와 당당하게 세상에 향해 그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장점이자 소통의 장, 인터넷을 기반으로 너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섰다.
그러자 이번엔 '괴담'이란다. 괴담에 따른 철없는 행동이란다. 학교에 공문까지 내려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막으려 한다. 지금 정권을 잡고 있는 그들 자신이 학창시절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 아닌가. 그런 그들이 정당하게 할 말을 하러 거리로 나온 10대 학생들을 공권력을 투입해 잡아들이고 있다. 신문들은 정작 이 10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기는 커녕 그들의 장인 인터넷의 단점들을 꼬집고, 그 어느 세대보다도 세상과 가장 많은 소통을 나누고 용기까지 갖추고 있는 그들을 괴담에 휩싸이는 분별력 없는 '아이들'로 몰아가고 있다.
그래도 얼마나 기특한 10대들인가. 그들의 형과 언니들이 제도권에 편승하고자 안간힘을 쓰며 도서관 안 개구리가 되어가는 지금, 그들을 대신하여 거리로 나왔다. 박수를 쳐줘도 모자랄 10대들이다. 다행스럽다. 새롭게 들어선 정권, 그리고 그들과 의기투합하고 있는 세상의 '어른들'. 그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조용하지 못한 우리네 사회지만, 동시에 그 어느 세대보다도 저항적인 지금의 10대들이 있어서 우리의 미래는 그리 어둡지만은 않은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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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있는 그대로 2008/05/28 00:02 x
제목 : 사람 취급 받고 싶다
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view.html?cateid=1018&newsid=20080527102714587&cp=yonhap&RIGHT_COMM=R1 <`촛불시위'에 다시 시름잠긴 與> 연합뉴스 | 기사입력 2008.05.27 10:27 ... 하지만 요 며칠 새 서울 도심에서 연일 대규모 촛불시위가 벌어지면서 분위기는 반전했다. 이번에는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도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공안정국 회귀'.. |
Tracked from [임프레스 매거진] 2008/06/03 19:50 x
제목 : 어쩌면 대학생들이 보수적인건 당연한게 아닐까?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은 보수적이라고 한다. 촛불시위에 중/고생들도 참여하는데 종종 대학생들을 시위를 비판한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IMF를 겪어본 세대다. 보리고개니 뭐니해서 IMF보다 한국이 어려웠던 적은 많다. BUT!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고 쭉 가난한 것과 왠만큼은 살다가 형편이 어려워지는 것. 어느 것이 더 불행할까? 개인적으로 후자라고 본다. 나라에 돈이 없고 집에 돈이 없어서 큰 회사들 부도나는거 눈으로 봤고, 집 평수 줄고, 부모님 이혼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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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
삶의이유 |
2008/05/25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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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가 스포츠만의 의미를 넘어설 때가 있다. ‘한일전’만 해도 그렇다. 축구, 야구 등 가릴 것 없이 어느 종목에서든 일본과의 경기는 우리에게 단순한 스포츠 경기, 그 이상이었다. 너도나도 경제적으로 힘겨웠던 시절, 먼 이국땅으로부터 전해져오는 박찬호, 박세리 선수의 승전보 또한 우리 국민들에게는 큰 위안이 되어주었다.
얼마 전, 5.18 광주항쟁 28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28년 전 독재정권에 의해 무자비한 탄압을 받아야만 했던 광주인들, 넓게는 호남인들에게도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선 존재였다. 광주사태를 일으키며 권력을 쥐게 된 전두환 정권은 3S(sports, sex, screen) 정책을 실시하면서 국민들을 상대로 일종의 우민화 정책을 시도했다. 이 정책의 대표적인 성공 케이스 중 하나가 바로 프로야구였다. 82년 지역 연고제를 기초로 출범한 프로야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인기몰이에 성공했다. 그 중에서도 광주를 연고로 한 해태 타이거즈는 가장 많은 인기를 몰고 다니는 팀이었다. 광주를 비롯한 호남사람들은 자신의 지역을 대표하는 타이거즈에게 환호하고 열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호남사람들은 그들의 철천지원수였던 전두환이 탄생시킨 프로야구에 가장 열정적인 호응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 아이러니만이 그들의 울분과 자존심을 분출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을 테지만 말이다.
전두환 정권도 열광적으로 타이거즈에 열광하는 호남사람들을 보며 그들의 정책 성공을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프로야구 출범 당시 해태 기업은 광주 야구팀 창설에 소극적이었을 정도로 해태 타이거즈는 그렇게 주목받던 강팀이 아니었다. 삼성과 같이 막대한 자금력으로 무장한 팀들이 쟁쟁했다. 하지만, 호남인들의 열렬한 열기 때문이었는지 해태 타이거즈는 거의 매년 프로야구를 재패하며 그 어떤 팀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팀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무기는 화끈한 정신력과 투지였다. 잘하는 팀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지사. 해태 또한 ‘전국구’팀이라 불릴 만큼 호남뿐 아니라 전국 각지에 팬들이 많아졌다. 이는 전두환 정권도 예상하지 못했을 터, 타이거즈는 호남인들의 울분을 대신하듯 매년 엄청난 경기력을 선보였다.
그러던 와중, 공교롭게도 처음으로 걸출한 호남인이 정권을 잡는 순간부터 타이거즈는 그 힘을 잃기 시작했다. 처음 정권교체를 이룩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는 98년, 99년 이후부터 타이거즈는 우승권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고, 최고의 명문 구단이라는 칭호는 퇴색되어져갔다. 급기야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최하위를 기록하는 수모까지 겪어야 했다.
주적을 잃은 탓일까. 굳이 야구만을 통해서 자존심과 열망을 분출해야할 필요가 없어져서 이었을까. 타이거즈의 열기가 예전만 못해진 것은 사실이다. 과거 울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년의 스타들은 이제 한두 명뿐이 남지 않았다. 하지만, 한 때 호남인들의 표상이지 자존심이었던 타이거즈, 지금은 비록 왕년의 빛을 잃었다 하더라도 단순한 스포츠팀 그 이상을 넘어섰던 이 얼마나 멋진 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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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티보이즈, 화려함 속의 그 절제
심심할때 |
2008/05/19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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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포스터에서의 두 남자 주인공은 밤거리의 화려한 네온싸인을 배경으로 보는 이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우리의 밤은 당신들의 낮보다 화려하다!' 하지만 영화는 처량하다못해 불편하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기대했던 화려함이 점차 그 자취를 감추더니 이내 그 빈 자리가 처절함과 지저분함으로 메워지기 시작했다. 비스티 보이즈들의 화려함은 영화의 포스터뿐이었다. 이 영화를 호평하는 사람들은 이 작품이 보여주고 있는 극강의 리얼리티에 환호하고 있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편함을 느끼게 할 정도로 이 작품은 강남의 밤의 적나라한 나체를 드러내보이고 있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영화가 보여주고자 하는 '현실'만이 아니다.
비스티 보이즈들, 그들의 직업은 그 어떤 직업보다도 매우 힘든, 어려운 직업이다. 기본적으로 여자들에게 호감을 살만한 준수한 외모를 갖춰야 한다. 빼놓을 수 없는 선천적 요건이다. 꾸준한 몸관리도 필수다. 마치 운동선수인마냥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것을 직업적 일과로 여긴다. 단순히 외양적인 근력만이 아니다. 일반인들과 달리 그들의 업무시간은 꼭두새벽이다. 그냥 밤만 새는 것도 아니다. 술도 마셔야 한다. 따라서 이를 견디기 위한 체력도 강해야만 한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것은 그들의 현란한 언술이다. 단 하루밤 사이에도 수 명의 여자들을 상대해야 한다. 단순한 '상대'가 아니다. 이 여자들을 달콤한 말놀림에 놀아나도록 해야 한다. 뿐만 아니다. 술자리를 유쾌하게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분위기를 띄우는데에도 뛰어나야 한다. 하지만 앞의 두 가지를 갖췄다고 해서 그들을 '프로' 또는 '선수'라고 부르지 않는다. '프로'와 '아마'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비스티 보이즈의 요건, 그것은 바로 '절제'다. 화려함 속의 절제. 언뜻보면 어색하다. 호스트들에게 절제라니. 하지만 이 절제는 영화 속에서의 승우(윤계상)와 재현(하정우)의 차이를 가장 극렬하게 보여주는 덕목이다. 승우는 이 절제가 부족했다.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을 선택했다. 반대로 재현은 절제할 줄 알았다. 재현은 프로였다.
승우는 지원(윤진서)을 만났다. 그리고 지원을 좋아했다. 동거도 시작했다. 하지만 승우는 지원에 대한 마음을 절제하지 못했다. 결국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지원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까지 갖게 되었지만 그 욕망은 비참한 칼부림으로 끝맺음되었다. 절제하지 못한 대가였다. 호스트로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 내내 인생의 바닥을 보여준 재현은 달랐다. 더이상 추락할 곳이 없어서 였을까, 한마디로 절제할 줄 알았다. 숱한 여성들을 단순한 돈벌이의 대상으로 이용할 줄 알았고,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주고 대신 빚까지 갚아주려했던 한별(이승민)에게까지도 피도 눈물도 없이 매정할 줄 알았다. 냉철한 '프로'였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쓰레기'라 치부해버릴 수만은 어려운, 인간의 정도를 넘어선 수준이었다.
얼마 전, '색,계'가 우리나라에서 흥행을 성공하였다. 영화의 주제는 제목 자체였다. 욕망의 위험한 색과 신중의 잔인한 계.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스파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잊은 채 끝내 남주인공을 사랑하고 말았다. 이 영화의 여주인공은 비스티보이즈의 승우를 많이 닮았다. 다른 모든 것을 내주더라도 마음만은 내주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절제, 즉 잔인한 신중함이 부족했다. 결국 그 대가로 승우와 다를 바 없이 슬프고도 야속한 자멸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강남의 휘황찬란한 네온사인 아래 그 누구보다도 화려하고 방탕하고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는 호스트들. 보통의 사람들을 향해,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이야말로 화려한 밤을 살고 있다고 외치는 그들이야말로 그 화려함 속에서 어떠한 사람들보다도 더 절제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아닐까. 아니, 인간의 가장 깊은 본성까지도 컨트롤하고 절제할 줄 아는 그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최고의 성인군자가 아닐까. 감정과 이성을 완벽하게 분리시켜낼 줄 아는 완벽무도의 현대적 인간, 비스티보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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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혼자생각 |
2008/05/15 0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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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일, 5월의 햇빛이 따사로이 느껴지질 즈음 어김없이 찾아오는 날이다. 어린이날로 한층 신났던 우리들의 마음이 어버이날로 숙연해지기 시작할 즈음 그 숙연해진 마음이 학창시절의 기억과 버무려져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르는 스승의 날 말이다.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루하루를 바쁘게만 살아가고 있는 요즘, 어쩌면 스승의 날은 우리에게 일년에 한번 스승에 대한 추억을 되새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스승의 날이 언제부터인가 지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5월만 되면 신문기사나 방송 뉴스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소식이 교사에 대한 촌지문제이다. 스승의 날만 다가오면 으레 ‘어느 지방 어느 초등학교의 교사 모씨가 학부모에게 촌지를 요구했다 혹은 받았다’ 등의 기사가 보도되어진다. 더불어, 순수한 의도로 제정되었던 스승의 날이 어두운 사리탐욕으로 얼룩지게 되었다거나 동심이 멍들게 되었다는 기사와 보도를 찾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러한 스승의 날에 대한 논란이 대두되자 정부에서는 최근 몇 년 간 아예 스승의 날에 학교 등교를 하지 않도록 하는 조취를 취하기도 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스승의 날에 스승을 뵈러 학교에 가는 일이 불가능했다. 재학생들뿐만이 아니었다. 학교가 쉬니 졸업생들 또한 모교의 선생님들을 뵈러 모교를 찾는 일이 불가능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다행이 다시 최근부터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번복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그 아이러니했던 기간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으로 남고 말았다.
물론 헛된 욕심에 눈이 멀어 학급의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옳지 않은 금품을 요구하는 선생님들이 단 한명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러한 극소수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선생님들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많은 수의 (거의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그들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제자들을 위해 쏟고 있다.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사람들, 특히 언론들은 언제부터인가 스승의 날만 다가오면 일제히 학교의 일부, 극히 소수의 선생님들의 잘못된 촌지 관행을 집중적으로 취재하고 보도하기 시작하고 있다. 선생님들의 어깨에 힘을 얻어줘야 할 스승의 날에 오히려 선생님들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다.
공교육을 살려야 한다. 요즘 한창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말이다. 그러면서 공교육을 살리기 위한 갖가지 방안들을 내놓기에 바쁘다. 과외 보충수업을 늘려야 한다느니, 학교에 대한 교육비 투자를 늘려야 한다느니, 몰입식 영어교육 실시해야 한다느니 등등 언론과 미디어가 공교육을 살리기 위해 쏟아낸 대안들은 매우 많다. 하지만 공교육이 살아나기 위해서 정작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선생님, 교사에 대한 권위와 믿음이 공교육이 살아나기 위한 가장 밑바탕이 아닌가. 매일같이 공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언론이 앞서서 교사에 대한 믿음과 권위를 추락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등등 도대체 어디에서 언제부터 유래했는지도 모르는 상품성 짙기만 한 별에 별 기념일에는 너나할 것 없이 선물을 챙기고 받는 행태가 명절 풍습인 마냥 행해지고 있으면서 스승의 날 정성스럽게 쓴 편지나 혹은 마음을 담은 작은 꽃다발 하나 스승께 마음 편히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서운한 일이다. 돈이 얼마나 무서운지, 정작 순수하지 못한 상업성에는 단 한마디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는 언론이 정작 힘없고 만만한 선생님들에게 조심스럽지 못한 비판을 함부로 해대고 있는 것이다.
원래 좋은 소리보다는 듣기 싫은 소리가 더욱 기억에 남고 반향 또한 큰 법이다. 또한 적당하고 적합한 쓴 소리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각성의 목소리다. 그러나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조심스럽지 못한 쓴 소리는 절대 생산적일 수 없다. 스승의 날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도 마찬가지다. 끝으로 스승의 날마다 떠오르는 고등학교의 한 선생님과 그 분에 대한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글을 맺는다.
고등학교를 다닐 때, 국어 선생님은 매우 특이한 분이셨다. 한 마디로 직업이 두 개셨다. 다른 하나의 직업은 바로 시인. 시인이신만큼 선생님은 문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으셨다. 그러신 선생님께서 종종 우리에게 강조하시던 것이 바로 ‘예물’이었다. 선생님께서는 뇌물과 예물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며 예물은 예로부터 예의를 차리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행해졌던 풍습이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면서 웃기게도 당신께 볼 일이 있어 찾아올 때는 꼭 예물로 찹쌀떡 두 개를 가지고 올 것을 강조하셨다. 나 또한 선생님을 뵈러 교무실에 간 적이 있었는데 역시 찹쌀떡 두 개를 가지고 갔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들고 온 찹쌀떡을 보시더니 기특한 녀석이라고 귀여워하시며 찹쌀떡 한개는 당신이 잡수시고 나머지는 나에게 먹도록 하셨다. 학생들이 가지고 간 찹쌀떡은 그 선생님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예물이자 선생님과 학생이 나눠먹을 수 있는 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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